인격적인 하나님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갖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격(人格, 사람 인. 격식 격)이란 한자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격식을 갖춘는 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는 세 가지 격식을 갖추어야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존재
둘째는 나는 죄인이라는 고백
셋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

누가복음 15장에 두 아들의 비유에서 작은 아들을 탕자라고 합니다.
탕자는 아버지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나눠 줄 재산만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몫의 재산을 갖고 먼 도시로 나가서 신나게 즐겼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그가 갖고 있던 재물은 모두 탕진되고 말았습니다.
당장의 배고픔을 해결하려고 작은 아들은 남의 집에서 돼지를 먹이며 돼지가 먹는 사료 쥐엄열매로 배고픔을 해결하려고 하였으나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 아버지의 집에는 여러 품군들이 있지만 그들은 배부른 일군들이라는 것을 깨닫고 아버지의 집에서 종으로 살아야 하겠다며 아버지를 찾아갑니다.
아버지의 집이 얼마나 필요한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사이를 물질의 관계로 인식했던 작은 아들은 물질이 아니라 아버지와 종의 관계로 인식의 세계를 넓혔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집에 다가갈 때 아버지는 그 아들을 잃었다가 다시 찾은 아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아들 즉 새로운 관계를 분명하게 깨우쳐 주었습니다.

하나님을 인격적 관계로 생각하지 않고 도깨비 방망이 또는 만능해결자로 생각하는 신앙생활에서 인격적인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갖는 일은 우리가 그분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며,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는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항상 우리와 가까워지기를 바라시며, 우리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를 원하십니다.
아담이 에덴 동산에서 범죄하기 전에 (창 3장)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알되 친밀하고 인격적인 차원에서 알았습니다.
그들은 에덴 동산에서 그분과 함께 동행하며 직접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러나 아담의 죄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과 분리되고 단절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관심을 갖지 못하는 사실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장 놀라운 선물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 선물은 만일 우리가 그분을 믿는다면,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로마서 6:23).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셔서 죄와 죽음에 대한 승리를 입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로마서 8:1).
만일 우리가 이 선물을 받아들이면, 우리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고 그분과 인격적인 관계를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갖는 사람들은 그들의 일상 생활에 하나님을 포함시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더 잘 알기 위해 기도하며, 말씀을 읽고, 그 구절들을 묵상합니다.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것들 중에서 가장 소중한 자산인 지혜를 구합니다 (야고보서 1:5).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며, 하나님께 그들의 소원을 아룁니다 (요한복음 15:16).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는 분이십니다 (로마서 5:8).
그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있는 간격을 좁히기 위해 다리를 놓으신 분이십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보혜사가 되기 위해 오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요한복음 14:15-17). 예수님은 죽기 전에 이 말씀을 하셨고, 그분이 돌아가신 후에 성령은 간절하게 성령을 받고자 구하는 모든 자들에게 임하셨습니다. 성령은 신자들의 마음 속에 거하시면서 결코 떠나지 않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권면하시고, 진리를 가르치시며, 마음을 변화시켜 주십니다. 이 거룩한 성령이 없이는 우리는 악과 유혹에 대항해 싸울 능력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성령이 우리를 다스려서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갈라디아서 5:22-23).

하나님과의 이러한 인격적인 관계를 갖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며, 그것을 얻는 어떤 신비한 공식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순간 우리는 성령을 받게 됩니다. 그러면 그분은 우리의 마음에 역사하기 시작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쉬지 말고 기도하며, 성경을 읽고, 성경을 믿는 교회에 가입하여 다녀야 합니다. 날마다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며 그분이 우리를 보존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사는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방법입니다. 즉시 변화를 볼 수 없을지는 몰라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할 것이고, 모든 진리가 분명해질 것입니다. 


인격이신 하나님

1. 하나님은 인격이시다.

 하나님은 인격이십니다. 혹은 하나님은 인격적이십니다 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습니까? 아마도 교회 생활을 하다 보면 인격적인 하나님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고 익숙한 분들고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인격이라는 단어가 무슨 뜻인지 설명해보라고 누군가 질문한다면 정확하게 어떤 뜻인지 모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인격이라는 말은 좀 어려운 말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이 인격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설명하고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인격이라는 것은 쉽게 말해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감정, 지식, 의지를 의미합니다. 우리 모두는 감성과 지성과 의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감정이 무엇인가요? 화가 나면 화를 내기도 하고 귀찮으면 짜증을 내기도 하고 기쁘면 웃기도 하고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행복해지기도 하는 것을 감정이라고 합니다. 우리 모두는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 지성을 무엇인가요? 우리 모두는 책을 통해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배우거나 경험을 통해서 무언가를 알게 됩니다. 어린 아이를 보면 처음에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지만 점점 자라나면서 사람의 이름을 배우게 되고 물건들의 이름을 배우게 되면서 지식을 쌓아가게 됩니다. 그것이 지성입니다. 우리 모두는 지성과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의지는 무엇인가요? 우리 모두는 자기의 감정만 가지고 살아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기 감정을 조절할 수 있습니다. 너무 기쁘고 웃기더라도 어렵고 어색한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웃음을 참기도 하고, 너무 화가 나는데 화를 내면 싸울 것 같아서 화를 안내고 삭히기도 합니다. 짜장면 먹을지 짬뽕 먹을지 고민하다가 그래! 오늘은 짬뽕이야~ 하고 결정하는 것 그것이 의지입니다. 우리 모두는 나름대로의 의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모든 사람들은 감성, 지성, 의지를 가지고 있는 인격적인 존재입니다. 여기 모인 모든 사람들은 어린 아이에서부터 나이가 많으신 분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인격적인 존재입니다. 여기서 인격적인 존재가 아닌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을 대할 때 어떻게 대합니까?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저 친구가 좋아하겠지? 하는 생각을 하고 그 친구를 칭찬하기도 하고, 내가 이런 조언을 해주면 저 동생의 지식이 자라나겠지? 하는 생각을 하고 그 동생의 수준에 맞게 가르쳐주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가 다들 인격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서로를 존중하는 것입니다. 서로를 배려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인격이기 때문에 서로를 존중해야 합니다.

 하지만 오늘 나누고 싶은 내용은요.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께서 바로 이 인격적인 존재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도 인격이 있으십니다. 눈에 보이지 않으신 하나님께 감정과 지성과 의지가 있다고 하니까 이상하게 들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로봇 같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1) 감정이신 하나님

 먼저 하나님은 감정이 있으십니다. 하나님은 화를 내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은 기뻐하시면서 웃으시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너무 슬퍼서 눈물 흘리기도 하십니다.

신 5:9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창 1:31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하나님은 우리와 같이 혹은 그보다 훨씬 풍성한 감성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가장 감성적인 분이십니다.

(2) 지성이신 하나님

하나님은 또한 지성이 있으신 분이십니다.

시 139:1-4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생각과 말과 모든 것들을 다 아시는 분이십니다.

시 147:4-5

4그가 별들의 수효를 세시고 그것들을 다 이름대로 부르시는도다

5우리 주는 위대하시며 능력이 많으시며 그의 지혜가 무궁하시도다

하나님은 별들의 수를 다 세실 수 있고 별이 몇 개나 있는지를 아시는 분이시고 그분의 지혜는 끝이 없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3) 의지이신 하나님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우리처럼 의지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살전4:3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하나님은 어떤 의지를 가지고 계십니까? 하나님은 거룩하게 되기 위한 의지를 가지고 계십니다. 죄악과 선이 있으면 선을 선택하시는 의지를 가지고 계십니다.

시 103:8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하나님은 또한 우리가 죄를 짓고 산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죄를 심판하지 않으시고 긍휼로 은혜로 오래 참고 인내하시는 의지를 가지고 계십니다.

여호수아 21:45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씀하신 선한 말씀이 하나도 남음이 없이 다 응하였더라

하나님은 또한 우리에게 약속하신 말씀을 하나도 남김 없이 다 이루시는 의지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의지이십니다. 하나님의 의지는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의지는 우리가 가진 의지보다 훨씬 차원을 넘게 강력하시고 선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감정과 지식과 의지가 매우 많이 있으신 분이십니다. 우리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은 감정과 지식과 의지를 가지고 계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인격적인 분이시고 우리보다 더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4) 인격이신 하나님을 무시한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대할 때에 어떻게 대하나요? 하나님께서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뭘 모르는 분이시라고 생각하고 무시하고 산다. 다른 사람은 무시하지 않고 신경쓰면서 그 사람의 감정이나 지성을 생각하면서 대하지지만 하나님은 없는 분 취급을 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눈에 보이시지 않기 때문에 모든 곳에 계신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시다. 하나님은 어느 곳에나 계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방에도 계신다. 우리가 혼자만의 시간에 혼자서 하는 것들을 하나님은 다 보고 계신다. 우리가 이불을 뒤집어 쓰고 침대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우리가 핸드폰으로 무엇을 보고 있는지 하나님은 다 아신다.

우리가 친구들과 함께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우리가 부모님과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우리가 이 자리에서 예배드리면서 뭘 하고 있는지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시고 보고 계신다.

심지어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도 계신다. 그래서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생각들도 다 알고 듣고 계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에 불평하거나 짜증나거나 화나거나 욕하거나 하는 생각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것들을 다 아신다. 심지어 하나님은 내 마음 속을 나보다 더 잘 아신다. 하나님은 모르는 게 없으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이렇게 모르는게 없는 분인데도 불구하고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셔서 우리를 벌하고 심판하지 않으시고 계속해서 우리가 변화하고 새로운 사람이 되기까지 기다려주고 인내하고 계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를 오래 참고 계신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없는 분 취급하고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인내를 무시하는 꼴이 된다.

2. 인격이신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바울의 이야기)

하지만 이렇게 말을 해도 하나님이 정말로 옆에 있는 친구와 같이 가족과 같이 함께 만나서 이야기하고 놀고 나누고 할 수 있는 인격이시라는 것을 믿지 못할 수 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이 정말 사실인지 내가 어떻게 알아? 거짓말일 수도 있고 사람이 만들어낸 이야기일 수 있잖아 하는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아마 누구라도 그런 생각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성경 말씀이 정말 사실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계기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정말로 살아계시고 인격적인 분이시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사건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어야 합니다.

(1) 사울 이야기

오늘 말씀을 보겠습니다.

행9:1-9

1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3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5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6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7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9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사울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매우 싫어했습니다. 그냥 싫어만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울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옳지 못한 사람들 혹세우민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그들을 감옥에 넣고 죽이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해서 살기 등등했고 그들을 잡아가려고 다메섹이라는 도시로 이동하는 중이었습니다.

사울이 이렇게 예수님의 제자들을 잡아 죽이기 위해서 길을 떠나 달려가고 있는데 갑자기 하늘로부터 빛이 임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빛이 사울을 둘러싸기 시작합니다.

사울은 이게 무슨일이래 하면서 땅에 업드려져서 어안이 벙벙하고 갑자기 일어난 일이 너무나 두렵기도 하고 해서 있는데 갑자기 하늘로부터 무슨 소리가 들려 오는 것입니다.

그 소리는 예수님의 소리였습니다. 예수님은 사울에게 말합니다. 사울아 사울에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그러자 사울은 깜짝 놀랍니다. 제가 당신을 박해한다구요? 당신이 누구신데요? 저는 아무도 박해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저는 옳은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옵니다. 나는 사울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사울은 갑자기 닥친 이 엄청난 사건을 경험하게 되고 인생이 완전히 달라지게 됩니다. 그의 인생은 예수님을 박해하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는 인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와 완전히 반대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을 전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돕는 위대한 복음 사역자로 위대한 사도로 성경 저자로 다시 탄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2) 사울과 같은 만남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을 경험한 사람은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다른 모습이 되어집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그 사람의 삶은 180도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울을 바꾸셔서 그가 바울이 되게 하셨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이 그렇게 자신에게 음성을 들려주시면서 대화하시면서 말씀하시는 분인지를 전혀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네가 박해하는 사람이 바로 나다. 라고 슬픈 마음을 가지신 분이라는 것을 전혀 몰랐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향한 뜻이 있어서 그를 만나시기로 뜻하신 분이라는 것을 전혀 몰랐습니다. 사울은 그 순간에 그 길가에서 인격이신 하나님을 제대로 만난 것입니다. 그는 너무나 놀라 자빠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만남이 있다면 사람이 안변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만 변할 것이 아니라 그 주변 사람들 모두가 변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들로 변화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일이 생긴다면 얼마나 값진 일일까요? 얼마나 기쁜일일까요?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다면 반드시 만나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그것이 옳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만나야만 삶을 제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바울은 열심히 살았지만 그의 방향이 완전히 틀렸었습니다.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죽이고 가두고 박해했고 그것이 옳은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완전히 틀린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후에야 그의 삶이 올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야 올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로 살아계시고 인격적인 분이시라면 나도 좀 만나 주시라고 나에게도 바울과 같은 사건을 주시라고 요청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생의 시간이 허비되어서 너무 아깝다고 억울하다고 때를 쓰고 애원해야 합니다.

3. 인격이신 하나님을 만나려면?

그렇다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원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 주셔야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신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다른 차원에 계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주시는 것이지 우리가 하나님을 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떤 버튼을 누르면 나오는 자판기와 같은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인격이시고 그분은 신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우리의 태도를 보여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싶다고 인격적이신 하나님을 경험하고 싶다는 요청을 드리고 그분 앞에 깨끗한 마음으로 서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들의 태도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1) 갈급한 사람이 되라.

먼저는 갈급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갈급한 사람을 원하십니다.  

마 5:3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우리의 마음이 가난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에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자 하고 하나님에 대해서 갈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계속해서 강조하여 말하지만 우리는 인간이고 피조물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신이시고 창조주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우리보다 높은 존재로서 생각하고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없으면 내가 살아갈 수 없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만나주시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이끌어주시지 않으면 내가 살아갈 수 없다는 내 삶의 문제들을 해결 할 수 없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바울은 하늘에서 음성이 들릴 때에 바닥에 바짝 업드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바짝 업드려서 그분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듣지 않는 교만함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교만한 자에게는 하나님이 만나주시지 않으십니다.

벧전 5:5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교만한 자는 하나님의 대적이 되지, 인격이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불행을 겪게 됩니다.

내 모든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이 나를 만나주시라고 요청하시기 바랍니다.

울면서 기도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것이 심령이 가난한 것입니다. 겸손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어떻게 할 수 없어서 눈물을 흘리는 것 제발 나좀 만나주시라고 눈물 흘리는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첫 번째 태도입니다.

(2) 마음이 정결한 자가 되자

하나님은 마음이 정결한 자를 만나주십니다.

마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하나님은 마음 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다 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있는 악한 생각들도 다 아십니다.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지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신지 시험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만나고자 요청한다면 하나님은 그것도 아십니다. 하나님은 그런 교만한 마음을 가진 자를 미워하십니다.

마4:5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6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7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은 마귀가 하는 짓입니다. 마귀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순결한 마음이 아닌 교만한 마음으로 대하길 바랍니다. 그것들의 꾀임에 속아 넘어가서는 안될 것입니다.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내 속에 있는 죄에 대해서 마음 아파하고 이 죄의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수시로 매일 회개해야 합니다. 내 안에서 솟아나오는 수많은 거짓들 교만들 악한 말들 욕심들을 그냥 내버려두어서는 안됩니다. 그것들을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나를 정결하게 해주십시오. 하는 애통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마 5:4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우리가 우리의 죄로 인해서 애통하고 눈물 흘릴 때에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만져주시고 위로해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회개의 눈물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주시고 우리의 손을 잡아주시는 것입니다.

(3) 믿음의 사람이 되자.

마지막으로 우리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히 11:6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우리는 믿음을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의 감정과 지성이 하나님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의 특징은 하나님에 대해서 별다른 감정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구지 만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는 점에 있어서도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하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마음과 지식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의지적으로 믿음을 선택해야 합니다. 믿음은 선택입니다.

히 11:8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아브라함은 어디로 가야하는지 모르는 상황에 있었습니다. 오히려 떠나가면 더 어려워 질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의 감정이 썩 내키지 않는 상황에 처해 있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믿기로 순종해야 합니다. 믿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 그를 기뻐하십니다. 그를 만나주십니다.

렘 29: 12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13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하나님을 불러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주여 주여 하고 부르는 것은 우리가 이 말씀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온 마음을 다해서 그분을 부르기를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을 수록 더욱 그렇게 해야 합니다.

없으신 것 같아 느껴지고 감정적으로 내키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럴 수록 더욱 하나님을 믿어보기로 선택하고 정말 살아계신지 정말 인격적으로 나를 만나주시는지를 알기 위해서 미친 사람처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기도해본 사람만이 이 이야기가 무엇인지 경험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4. 결론

오늘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는 인격이신 하나님을 너무나 모르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감정을 가지신 분이시고 지성을 가지신 분이시고 무엇보다 의지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과 인격적인 만남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과 대화하고 하나님과 손을 잡고 하나님과 함께 공감하는 그러한 인격적인 만남을 가져야 합니다.

이 만남을 가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한다고 했나요? 먼저 우리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하나님 앞에 바짝 업드려서 하나님을 갈망하는 갈급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를 회개하면서 정결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내 죄를 어찌할 수 없으니 하나님 해결해 주십시오. 하는 마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받아들이기로 결단하고 우리의 입을 통해서 그분을 불러야 합니다.

인격이신 하나님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만나시길 큰 복 얻는 시간 되시길 축복합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

신앙은 하나님을 섬기는 행위를 말합니다. 다르게는 믿음을 가졌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나 교회에 다니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전인격적으로 믿고 의지한다는 말입니다. 전인격적이라는 말이 이해가 되지 않거나 모호하게 들릴 수 있으므로 간단히 설명한다면, 하나님의 성품(속성)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전능, 전지, 무소부재(편재(遍在)), 미리 아심, 영원, 지혜, 완전, 무한, 눈으로 볼 수 없음, 등등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속성 중에 전지전능을 좋아하고 또 그 중에서 축복, 사랑, 위로, 희망 등으로 나타나시기를 기대합니다. 실제 신앙인들 가운데 여기에만 초점을 맞춰서 신앙을 이어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언제부터인지 한국교회의 보편적 신앙관점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어 축복을 받을 것인가에 집중하게 되고, 그 증거로 방언이나 신유나 계시 등 은사를 추구하는 신비주의가 범람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으려면 성령세례를 받아야 하고, 성령세례를 받은 증거는 방언이며, 방언으로 기도하면 응답이 더 잘 되고, 성령이 임해서 방언을 받았으므로 하나님과 직통으로 통할 수 있다고 자랑합니다. 그러니까 초월적인 어떤 현상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방언의 은사를 받았으면 하나님을 만난 것일까요? 여기에 회의를 갖는 경우가 많습니다. 은사 즉 방언이나 계시를 받은 사람들 가운데 주를 위해 사는 사람이라거나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가는 모습보다는 자신의 우월감 혹은 이기를 추구하지 그리스도의 인격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여겨지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은사는 곧 하나님을 만났다는 말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만난 것과 하나님의 성품을 닮는 것은 다른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약에서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과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은 연결선에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을 통해 은사를 주고 그 사람을 드러내기보다는 인격적으로 그를 통해 역사하기를 기뻐하신다고 봐야겠지요. 바울이 주장하는 것도 그러합니다. 그래서 나온 말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은사를 받는다는 것에 대치되는 말이기도 합니다. 은사를 받음과 동시에 인격적인 만남을 갖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격적으로 만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격적으로 만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요? 이 또한 무엇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영적인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반적 표현을 빌자면, 인격은 지정의(知情意)의 3요소가 포함된 것이고, 지정의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인격적 만남이라고 합니다만, 나는 이렇게 봅니다. 어떤 형태로든 내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절대자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환희나 기쁨 가운데 선명하게 각인되는 경우도 있고, 기쁨에 겨워 눈물을 흘리거나 자신을 들여다보게 됨으로 격하게 비천함을 깨닫게 되기도 하는데, 중요한 것은 그런 현상보다는 그 가운데 강렬하게 하나님을 절대자로 인식하거나 깊은 마음의 고백입니다. 그런 작용은 성경을 보거나 설교를 듣거나 어느 순간 다른 일 하다가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마치 운명적인 역사라고 할까요(?) 그렇게 다가옵니다. 이런 인격적인 만남은 다른 사람의 분위기에 잘 휩쓸리지 않습니다. 자신의 내적인 강렬한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 하나님!”의 순간,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순수한 고백을 하게 되면 이런 것들로 우월적 존재가 된다고 생각지 않고 내가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한다는 것으로 작용됩니다. 헌신! 우리 신앙이 상황에 휩쓸리고, 나도 모르게 좋고 나쁨이 반복되는 것은 모두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한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면 무엇이 좋아지냐고요? 형통해질까요? 은사가 충만해질까요? 아닙니다. 영혼의 심연에 뿌리를 둔 신앙을 갖고 주님과 동행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백성의 긍지를 가지고 살게 됩니다. 고난이 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 쓸데없는 고난을 어리석게 자청하지 않으려 하고, 고난 닥쳐도 고난 가운데서 주님과 함께 견디고 이겨나갑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와 힘과 희망을 갖습니다. 왜냐고요?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심을 아니까요. 하나님과 인격적인 만남을 갖게 된 사람은 또 다시 새로운 만남을 갖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이 내주하시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만남이요, 영원한 동행입니다. 그러니까 인격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만남은 한순간 온전한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변화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지향점을 갖고 계속 진행됩니다. 일단 이 길에 들어선 사람은 길이 험하든, 황금 표지판으로 유혹하든(아마 마음은 잠깐 흔들릴지 모르죠.), 사탄이 유혹하는 쪽의 길이 금길이든 그것들이 결정적인 타격을 주어 이 길, 저 길을 들어서서 혼란 속에 빠지지 않습니다. 사탄이 말하겠죠. “뭐 그리 바빠? 천천히 놀고 가!” 그는 이렇게 답할 것입니다. “나는 지금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습니다!”


인격적 만남이란 무슨 뜻인가요?

[질문] 인격적 관계라든지 인격적 만남이라는 표현을 가끔 듣게 되는데 정확히 무슨 뜻인가요?

[답변] 질문은 아주 간단하지만 그 의미는 가볍게 다룰 성질이 아닙니다.
질문의 정확한 의도가 틀림없이 기독교적 용례, 예컨대 “신앙은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는 것”이라든지 “구원은 살아계신 예수님과 인격적인 만남이 전제”라고 말할 때의 정확한 뜻을 물으신 것으로 짐작되기 때문입니다. 예의 용례에서 문자적 혹은 사전적 정의(定意)만으로는 그 해석에 턱 없이 부족하리라는 것은 누구라도 쉽게 짐작할 수 있지 않습니까?

국어사전에선 ‘인격’을 네 가지로 구분해 정의하고 있습니다.
1. 사람의 품격, 자격,
2. 법률적 행위의 주체,
3. 개인으로서 독립할 수 있는 자격,
4. 자각이 있고 도덕상의 책임을 질 만한 자격이 있는 개체.
- 새국어대사전, 한국도서출판중앙회 1997년간

일반적으로 ‘인격적’이라고 말할 때는 품성, 기질, 매너 등이 도덕적이며 이성적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본능에 의존하지 않으며, 비이성적이거나 반윤리적이 아니며, 사회적 규범을 잘 따르기에 동물과 대비해 인간다운 기본 품격을 갖추었다는 뜻입니다.    

(예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사도행전 9: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그러나 성경적 의미에선 반드시 하나님과 연관해서 사용되어집니다. (성경에서 인격이라는 용어가 사용된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에서 말하는 바를 신학적으로 정리한 용어입니다.) 특별히 창세기의 이 말씀에 근거합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1:26,27)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창조되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닮았지 하나님이 인간을 닮은 것이 아닙니다. 외적 형상을 닮은 것이 아니기에 그분을 흰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고결한 신선처럼 상상해선 안 됩니다. 품성과 속성 등에서 닮게 창조되었다는 뜻인데 그중에  가장 중요한 형상은 하나님에게 지정의(知情意)가 있듯이 인간 또한 그렇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인격은 동물과 다른 인간 특유의 모습으로 지성, 감정, 의지를 동원해 스스로 판단, 결단, 시행할 수 있는 총체적 능력입니다. 인격적이라는 말도 지정의를 전부 동원해, 즉 한 인간이란 개체 전체가 인간답게 행동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상기의 사전적 정의 중에 성경적 의미와 가장 유사한 것은 4번입니다.) 물론 동물도 비록 그 수준이 낮긴 하지만 지정의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직 생존과 번식 목적에 따라 무조건 본능에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목적과 별개로 스스로 어떤 일을 도모해 시행할 수준이 결코 아닙니다.

반면에 인간은 하나님의 뜻대로 이 땅을 거룩하게 다스려야 합니다. 그래서 그 지정의가 동물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아주 고급한 수준으로 창조되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그 지정의를 통괄할 수 있는 영혼을 하나님으로부터 부여 받았습니다. 그분 뜻대로 살아야 하니까 그 뜻을 지각하고 교통할 수 있는 통로가 있어야 하는데 바로 그것이 영혼입니다.

따라서 성경적 의미의 인격이란 지정의뿐만 아니라 영혼도 포함된 한 개별 인간의 총괄적 특성이며, 인격적이란 동물과 다른 영적 존재로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나쁜 짓을 하지 않고 윤리적으로 선하게 행동한다고 해서 성경적 의미로는 인격적인 것과는 별개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면 당연히 선하고 의롭게 행하게 되고 또 인격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하게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즉, 성경적으로 인격적인 여러 모습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이런 기본적인 정의를 염두에 두고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과 관계의 의미를 살펴보기로 합시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야 구원을 얻는다는 말의 뜻을 살피되, 이해를 돕기 위해 먼저 부정적인 의미 즉 인격적 만남과 관계가 아닌 것부터 따져 보겠습니다.  

우선 성경공부를 통해 기독교 교리들이 납득되어 믿기로 결심했다고 해서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중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니고는 죄 사함의 길이 없다는 사실을 수긍했다고 해서 구원을 얻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교리에 대해 단지 머리로만, 즉 지성과 의지만 동원하여 반응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간혹 불신자가 말기 암 선고를 받고 병원에서도 치료를 포기하면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기독교의 기도원에 올라갑니다. 또 울고 불면서 간절히 기도하여 기적적으로 낫는 경우가 가끔 나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당장 교회에 출석한다고 해서 온전한 신자가 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단순히 초자연적 간섭만 있었는지 혹은 그 사람과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이 실제로 있었는지는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또 신자 친구의 권유를 받아 불신자가 찬양, 간증, 치유 집회에 참석해 아주 감동될 수 있습니다. 뭔가 신령한 은혜를 받은 것 같고 자신 속에 쌓여 있던 모든 어둠이 가셔버린 것 같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결단의 초대에 응해 예수를 구주로 영접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 사실 하나만으로 믿음이 생기고 구원을 받았다고 함부로 단정 지을 수 없습니다. 만약 감정적 흥분에 부응해 결단한 것뿐이면 전인격이 동원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지성 감성 의지 중 하나 혹은 둘만 동원된 경우는 인격적 만남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또 그 셋이 다 동원되어도 영혼이 하나님의 뜻과 다르게 작동되었다면 여전히 인격적인 만남이 아닙니다. 한 인간이란 개체 전부가 하나님의 뜻에 맞게 반응해야 합니다.

쉽게 말해 사람 전체가 완전히 바뀌어야, 더 실감나는 표현으로는 뒤집어져야 합니다.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사람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 말은 또 그 바뀐 사람으로서 계속 살아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일시적 부분적 변화만으로는 인격 자체가 바뀐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자기 내면의 수양과 도덕적 삶의 표본으로 받아들여 그분이 가르친 계명만 순종하는 것은 종교적 도덕적 만남과 관계일 수는 있어도 인격적인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럼 이제 인격적 만남과 관계의 구체적인 의미를 살펴 볼 차례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한 인간이 지정의와 영혼까지 총괄적으로 동원하여 최초로 나타내는 반응이 만남이며, 그 이후 죽어서 천국가기까지의 지속적인 반응이 관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른 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종교적 선각자나 도덕적 스승으로서가 아닌 자기 개인의 구세주로 영접한 후에 평생을 두고 자기 존재와 삶과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선 가장 먼저 성령이 그 영혼에 간섭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나타나는 최초의 반응은 자신이 정말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온전한 인식과 그에 따른 철저하고도 전인적(全人的)인 회개여야 합니다. 단순히 자기가 범한 나쁜 행동 몇 가지를 반성하고 또 치명적으로 잘못된 습관 한두 개를 고쳐선 안 됩니다. 자기라는 존재 전체가 죄에 묶인 노예로 그 영혼이 완전히 타락해 있었기에 죄스런 행위가 따라 나온 것이며, 그 근본적 발단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외면, 거부, 배반 심지어 저주했기 때문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 필연적 결과로 지금까지 하나님을 모르고 살았던, 혹여 지식적 종교적으로 알았더라도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 삼지 않았던, 삶이 정말로 향방 없는 달음질이요 허공을 치고 만 완전한 허사였음을 뼈저리게 느껴야 합니다. 또 그럼으로써 오직 자신과 자기 가족만의 안락과 형통을 위해서 세상의 방식대로 따랐던 옛 생활이 이뤄낸 것이라고는 공허함과 갈급함과 더러움과 추함 뿐이었음을 처절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상태로 계속 있었다면 그야말로 영원한 사망의 길로 흘러들어가 자기 인생에 소망이라고는 단 한 치도 없었을 것이라고 확신해야 합니다.  

나아가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에게서 절대적이고도 영원한 소망의 빛을 발견해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분의 죽음에 동참하여 자신의 죄와 허물이 영단번에 깨끗이 씻음 받아서 이전에 이 땅의 한시적 삶에만 목표를 두었던 인생을 완전히 청산해야 합니다. 그분의 부활에 연합하여 예수님의 의로 덧입혀진 새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서 이제는 오직 그분의 신령하고도 거룩한 통치를 받아 그분 뜻에 따라 살며 천국에서 궁극적인 영광을 누릴 소망을 키워 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일련의 과정이 인간의 지정의적 노력만으로는 절대 이뤄지지 않습니다. 사탄의 노예가 되어 있는 동안에 타락했던 영혼을 성령께서 새롭게 해주셔야만 합니다. 그래서 도무지 나와는 상관이 없고 까닭 없이 밉기만 했던 십자가 예수가 이제는 유일한 구원의 길이자 풍성한 새생명임을 확신하게 되고 아무 이유 없어도, 즉 자기가 처한 현실적 여건과는 상관없이 좋기만 해야 합니다. 당연히 이제부턴 십자가의 아름다운 덕과 향기를 세상에 증거하는 것만이 인생의 목표가 되었고 또 실제 어떤 방식으로든 실천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1-3)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이란 성령님의 간섭과 은혜로 십자가 예수님을 자신의 존재, 삶, 인생 전부의 온전한 주인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 5:17-19)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로서 그분의 거룩한 통치를 온전히 받는 것, 특별히 이전의 자기와 같았던 자들을 하나님께 화목케 하는 직책을 실현하며 사는 것이 그분과의 관계입니다.

인격적 만남과 관계란 상식적으로도 만나야할 두 인격체가 있어야 하며 서로에 대해 속속들이 알아야 하며 또 각자가 상대의 원하는 대로 적절하게 반응해야 합니다. 제 삼자, 혹은 책과 편지 같은 매개체를 통한 간접적 교류를 두고 인격적 관계라고 하지 않습니다. 신자 개인의 내면적 수양, 자성, 묵상, 직관, 득도는 더더욱 아닙니다. 반드시 살아 계신 절대적 객체로서의 하나님과 조우가 있어야 하며 또 그 때에 그분에게 들은 말씀이 있어야 하며 그 말씀에 따라 자신의 전부를 건 순종이 따라야 합니다. 요컨대 전지전능하시고 선하신 하나님에게 자신의 전부를 내어 드려서 이제는 그분이 죽으라면 죽을 수 있어야 합니다.

바꿔 말해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이 종교적 개념, 사상, 원리, 신조가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당신께 나아올 수 있는 길로는 오직 독생자의 죽음과 부활에 인격적으로 동참하는 자들에게만 열어 놓은 역사적 사실이자 절대적 진리입니다. 지금도 땅과 하늘의 모든 권세를 주관하시는 예수님이 한 죄인의 존재를 완전히 뒤집은 후에 그 삶과 인생을 이전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거룩하게 이끄십니다. 그래서 신자 또한 오직 성령의 인도를 구하며 말씀과 기도에 전무할 때에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와 권능 가운데 있음을 구체적인 말로는 표현할 수 없지만 확실히 인지하고 누리게 됩니다. 완전한 비유는 아니지만 알기 쉽게 말하면 애인과의 관계처럼,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처럼 예수님께 반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격(관계면)

이사야 48:17
너희의 구속자시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이신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는 네게 유익하도록 가르치고 너를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라.

1.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이신 여호와

본문에서 말씀하는 분이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이신 여호와”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이는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만의 국가 신이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한 표현이 아닙니다.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사 46:9)고 말씀하신대로 여호와 하나님은 전세계에 유일하신 창조주이시며,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본문의 표현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하여 구별 받은 성도들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과 돌보심을 나타내기 위한 표현이며, 또 여호와 하나님으로 나타나신 것은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으로서 구별된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는 신본주의의 길을 버리고 인본주의의 악을 따라서 살아가는 악한 자들에게 특별히 나타나셔서 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 받은 모든 성도들은 영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요(마 3:9, 갈 3:7), 이스라엘 백성된 우리들에게 약속을 지키지 아니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대한 안타까움을 가득 품으신 채 나타나셔서 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인격(성도와의 관계면)

1) 구속자 하나님

디도서 1,2,3장에 보면 구주 하나님으로 나타나셔서 말씀하신 대목들이 여러 번 나옵니다. 우리 하나님은  “너희의 구속자시요” “구속자”라는 원어를 살펴보면 그 뜻은 '되 사다, 속량하다, 구속하다, 근친의 역할을 행하다'라는 뜻입니다. 똑같은 단어가 룻기에서는 '기업 무를 자'(룻 2:20 ; 3:9, 12, 13 ; 4:1, 3, 6, 8, 14)로 번역되었으며 구약에만 100회 이상 나옵니다.

'기업 무를 자'란 구약의 율법에서 온 것인데 상속 근친의 의무 규정입니다. 만일 가난한 친족이 빚 때문에 땅을 팔았다가 살 능력이 없으면 상속 근친이 값을 대신 치르고 사주어야 할 의무를 말하고 여호수아 30장 3절에서 9절에 보면 살인죄를 지어 마땅히 죽어야 할 자가 ‘피의 보수자’로 인하여 죽음을 면하게 해 주는 것과 같이 원죄와 본죄로 죄인된 인간들에 대하여 이러한 '기업 무를 자'가 친히 되시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모든 인간들은 죄를 범하였으며 그로 인하여 전 인간에게 사망이 왕노릇하게 되었고, 그 죄 문제와 사망의 문제, 마귀의 종된 문제, 지옥의 가난, 고통, 절망의 문제를 해결할 만한 능력이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이 문제는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는 죄 값을 치를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독생자의 보배로운 피를 인간의 죄 값으로 치르셔서 이러한 문제들을 영원히 완전히 해결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값없이 은혜로 기업 무를 자가 되어 주신 것은 우리의 구속자이시며, 사랑과 체휼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매무지한 백성아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그는 너를 얻으신 너의 아버지가 아니시냐 너를 지으시고 세우셨도다”(신 32:6)

2) 교육자 하나님

한국의 교육 열풍이 세계에서 제일 강하다고 합니다. 실제로 어느 중학생에게 물어 보니 한달에 과외비와 학비, 잡비등을 계산해 보니 5,60만원은 족히 든다고 들었습니다. 고등학생, 대학생이 되면 보통 한달에 100만원짜리 월급쟁이만큼 돈을 들여서라도 공부를 시키는 것이 한국 교육의 실상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교육을 시켜도 사람다운 사람을 만드는 데는 한계가 있음을 우리는 너무나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과 17절의 말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는 말씀과 같이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와 같이 온전한 자를 만드시기 위하여 성경 말씀을 주셔서 의로 교육시키시는 하나님 아버지라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나는 네게 유익하도록 가르치고”, “가르치고”의 원어의 뜻은 ‘배우다, 가르치다, 훈련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앞에서는 말씀을 교육시키는 면을 봤읍니다만 어린 아이와 같은 우리, 개망마니와 같이 예수를 몇 십년을 믿어도 옛사람이 그대로 살아서 숨이 죽지 않은 퍼런 배추 같은 인간, 배운 것을 금방 까먹고, 또 배워도 까먹는 인간, 알고도 행하지 못하여 고범죄를 무수히 짓는 우리 인간들을 피로 값 주고 사셔서 쉬지 않고 영감과 진리로 인도하시고, 각종 환경을 직접 만들어 주셔서 경건의 연습을 통하여 예수님 닮은 사람을 만드시기를 원하셔서 교육시키는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교육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유익하도록만 교육시키시기 위하여 모든 환경을 만들어도 주시고 인도도 하여 주심으로 때로는 외롭게 혼자만 있는 것 같이 느껴 지는 환경도 주시고, 힘들고 지치고 어려워 하면 주변에 사람들을 붙여 주셔서 사랑과 은혜와 위안의 교제도 하도록 하시고, 때로는 너무 기쁘고 감사해서 미치고 환장할만큼 기쁜 환경을 만들어 주시고, 때로는 홍해 앞, 사자굴, 풀무불, 굶주림, 병등 온갖 환경을 만들어 주시더라도 교육의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꼭 필요하셔서 만들어 주시는 줄 알고 감사함으로만 받고, 청종을 본능화 하는 삶만 함으로 승리하는 자들이 되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는 수입만 보는 자가 됩시다!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딤전 4:4-5)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3) 인도자 하나님

① 전지 전능자로

우리 하나님은 인도자 하나님이십니다. 이 인도자는 ‘밟다, 행진하다, 나아가다, 인도하다’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시편 23편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 우리가 하나님의 목적대로의 사람으로 성장 해 가고 연습해 가는데 필요한 모든 환경으로만 인도하시는 하나님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분인 줄을 잘 몰랐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인도해 주심의 놀라운 경험을 체험하고도 광야에서 원망, 불평, 짜증, 시험하는 죄를 지어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전멸당한 교훈을 보고 우리는 어리석게 그 증인들의 부끄럽고 어리석은 길을 다시 답습하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마땅히 행할 길로만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이사야 42장 16절에 보면 “내가 소경을 그들의 알지 못하는 길로 이끌며 그들의 알지 못하는 첩경으로 인도하며”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일 분 일 초 앞으로 어떻게 될지를 알지 못하며, 어떤 길이 생명길이며 사망길인지, 성공과 실패, 영광과 부끄러움의 길을 분별하지 못하는 우리들을 전지전능자로서 실패하지 않고, 헛수고 하지 않고, 짧은 나그네 인생을 통하여 온전하고, 거룩하고, 구비한 자로 만드시기 원하셔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② 예수님으로

또한 우리의 유일하고 영원한 선생님 되시는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창조주가 피조물이 되기까지 낮아지심의 모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의 희생의 모범, 새벽기도와 철야 기도, 금식 기도, 강청의 기도와 같이 기도의 모범을 보이셨고, 틈 나는 대로 이 동리 저 동리로 다니시면서 전도의 모범을 보이셨으며,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신 순종의 모범을 보이시면서 제자들과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시다.

③ 성령으로

오늘날은 보혜사 성령을 통하여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일 2:27) 우리가 당한 현실 현실마다 어떻게 언행심사를 하며 살아야 할지를 남김 없이 가르쳐 주시고 인도하시는 성령님을 통하여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도, 기도 할 때에도,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도, 경우에 따라서는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할 때에 감동시켜 주시기도 하셔서 끊임없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이제 남은 관건은 우리가 이 성령의 인도를 따라서 살기 위하여 얼마나 깨어서 그의 음성을 듣느냐 하는 것과 들은 대로 얼마나 실행을 하느냐 하는 것이 과제입니다.

3. 청종을 본능화 합시다

우리는 신앙 생활을 하면서 이렇게 철두철미하고 끊임 없이 우리를 구속의 사랑으로, 범사에 유익하게 교육하시며,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인 영감을 따라서 예수님처럼 ‘아니오’는 한 번도 되지 않고 청종으로만 나아가는 자들이 됩시다.

이럴 때에 약속에 신실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강과 같은 평강, 바다 물결 같은 의, 모래 같은 후손의 축복, 그 외에도 우리에게 필요한 좋은 은사와 신령한 것들을 후히 주실 때 누리는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약속의 주인공, 축복의 주인공이 됩시다.





인격적인 하나님

마태복음 11: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사도행전 14:15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성경은 하나님에 대해서 살아 계셔서 행동하시는 인격적이신 신으로 계시하고 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이라는 것이 바로 인격성을 강조하는 고백인 것이다.

살아 계신 하나님이란?
역사 속에서 움직이시는 하나님이신 데, 자신을 역사 하심으로 자신의 존재를 나타내시고, 이것으로 우리에게 계시하심을 말하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언제나 인격적인 관계를 가질 것을 원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격적이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인격성이란 역사 속에 나타나시는 여러 가지의 활동의 모습을 의미하는데, 그 인격적이신 하나님은 살아 계시기 때문이며, 또 우상들과는 달리 인간의 뜻을 초월하셔서 자신의 거룩하신 뜻을 결정하시고, 섭리하시고, 이루어 나가신다.

우리는 오늘 그와 같은 하나님을 살펴봄으로서 하나님께 대한 지식을 더하고자 한다.

1. 하나님의 인격성에 대한 성경의 증언은 무엇인가?

1) 하나님의 인격적인 요소는 무엇인가?

우리는 인격의 요소를 감정, 지성, 의지로 본다. 성경에는 이와 같은 요소들을 하나님께서 지니고 계심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예민한 감수성을 지니셔서 기쁨과 슬픔의 감정을 지니고 계신다. 그 감수성 중에 가장 뛰어난 특징을 사랑이라고 말하는데 하나님은 이 사랑을 충만히 갖고 계신다. 또 완전한 지성을 소유하고 계시므로 지혜와 지식이 뛰어나시며, 함께 거룩하신 의지를 갖고 계신다.

▶창세기 6:6 -- 땅에 사람을 지으신 것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심

▶시편 103:8-13 -- 노하기를 더디 하심,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심

▶요한복음 3:16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심

▶창세기 18:19 --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들을 택하였나니

▶출애굽기 3:7 --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시편 115:3 --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하셨나니,

▶요한복음 6:38 -- 내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함이라,

2) 인격적이신 하나님의 구체적인 활동은 무엇인가?

① 우리와 대화하기를 원하신다(창세기 1:3)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자신의 형상과 인격성에 따라 창조하셨다. 그리고 창조한 사람들과 인격적으로 사귀기를 원하시고 계신다. 그런데 만약 우리 인간들이 주권을 갖고 있는 하나님과의 인격적 대화를 거부하거나 그 관계를 깨트린다면 결국 불순종과 불 신앙의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이 된다.

이렇게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시대 시대마다 성경과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을 해 오고 계시는 것이다. 이제는 그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오셔서 말씀으로 우리와 진정한 교제를 나누시기를 원하신다.

② 하나님은 인간들의 행위를 보시고 듣고 계신다(창세기 11;5, 시편 94:9)

하나님의 인격으로 거룩하게 지음을 받은 인간은 이제 그 인격 속에서 자신들의 행동과 삶을 책임을 져야 하는 위치에 와 있다. 우리 사람들은 어떠한 일들을 보고 듣고 느끼며 판단을 하면서 자신의 삶을 책임 있게 관리해 나아가듯이 하나님께서도 자신이 창조한 인간들을 보고 듣고 느끼며 판단을 해 나가고 계시는 것이다.

③ 하나님은 불의한 인간에 대해서는 진노하신다창세기 6:6, 신명기 1:37)

인간은 하나님만을 섬겨야 하는데 이를 거역하고 물질에 푹 빠지거나, 세상의 허영만 들뜨거나, 죽은 형상인 우상을 섬길 때에는 하나님은 우리를 맹렬하게 질투를 하시면서 진노하시는 것이다.(출애굽기 20:5)

하나님은 감정을 지니고 계시는 분이시다. 그 감정은 분노로 나타나는데,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한 백성들에 대하여(수 7:1)--아이 성이 패한 이유-아간이 하나님 뜻을 거역하고 물건을 훔침

▶불 신앙하는 백성들에 대하여(시78:21,22)--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고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함--노하심

▶우상 숭배하는 백성에 대하여(삿 2:11)--사사시대에 하나님 목전에서 바알을 섬김

▶잘못하는 백성에 대하여(삼하 6:7)--법궤가 예루살렘으로 갈 때 소가 뛰놀자 웃사가 거룩한 법궤를 붙듦--죽음

④ 하나님은 자신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따뜻한 마음으로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시다.(시편 114:4)

인격을 지니신 하나님은 그 인격의 특성에 따라 섭리하시고 보존해 나아가시는데 분노해야 할 가운데서도 오래 참으시며 기다리신다.

▶하나님은 진노를 발하기 전에 참으신다.(시78:38)--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없을 때 진노하셨으나 여러번 돌이키심

▶불의한 세상에 대하여 참으신다.(롬3:25)--불의한 세상을 예수의 피로 화목제물로 삼으시고 참으심

▶재앙을 내리시기 전에도 참으신다.(창18:23-32)--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려 하시는데 의인 10명이 없어 멸망함

2.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인격성은 무엇인가?

전능하신 하나님은 자신의 모습을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게실 당시 따르는 사람들 중에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하였다. 사실 하나님을 믿기는 믿는데 눈에 안보이고 만져지지 않으니 하나님을 보고 싶은 것은 사람들로서는 당연한 것 같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14:10)고 하셨다. 하나님의 인격성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밝히 드러난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떤 하나님을 보여주셨는가?

1)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셨다.

불의한 사람들에 대하여 한없이 거룩하신 분으로, 또 한없이 긍휼하신 분으로 나타나셨는데 이는 인생을 향하신 창조주의 감정을 보여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감정은 사랑에 기초를 두고 있다.(사람들의 감정은 자기의 이기적 목적에 기초를 두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시되 자신이 가장 아끼시는 독생자까지 이 땅에 보내 주셨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인 것이다.

2)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지성”을 보여주셨다.

마5:-7:의 산상수훈을 보면 “너희 중에 죄 없는 이부터 돌로 치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탁월하신 하나님의 거룩하신 지성을 보여주고 있다. 사람들은 지혜롭다 해도 본성이 악하기 때문에 모든 지혜가 원수를 갚고 보복하는 반경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거룩에 기초를 두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과 거룩에 기초를 둔 지성을 갖고 계신다. 하나님은 모든 이간들의 지혜를 초월하신 거룩한 지성을 보여주셨다. 특히 사탄과 인간들의 불의를 참으시고 끝까지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를 향하여 나아가셨다. 이것을 볼 때 하나님은 얼마나 거룩한 지성을 지셨는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3)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의지”를 보여주셨다.

인격적이란 스스로 결단을 내리는 존재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내리시는 결단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깊이 생각을 하셨다. 어떻게 하면 죽은 인간들을 구원할 수 있을까? 그래서 우주적으로 최대의 결단을 내리셨는데 그 결단이 바로 “성육신 하신 사건”이다. 또 하나의 최대 결단은 모든 악의 세력을 물리치시기 위하여 자신이 지니신 인성의 한계도 극복하시고 십자가를 지시는 “겟세마네의 결단”이다. 이러한 결단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결단이다.

3. 우리는 인격적이신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까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믿음을 가져야 한다.

믿음은 “인격적 관계”를 가능케 하는 유일한 수단이다.

우리는 서로간에 상업주의적 풍조에 물들어져 있다. 모든 것을 나 외에는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는 환경이 우리 마음과 사상에 뿌리내려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물건을 구입하려고 해도 믿을 수 있는가? 가격이 합리적인가? 집을 구입하려고 해도 속고사는 것이 아닌가? 사람을 사귀려고 해도 이 사람은 신실하고 믿을 만 한가?

여러분들도 저를 청빙 할 때에 아마 신실한가에 대해서 깊이 생각을 했을 것이다.

처음 선택할 때는 그렇게 신중히 해야 한다. 영혼을 치료하는 목사를 잘못 선택하면 영원한 멸망이 기다리고 있으며 잘못된 신앙 사상은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저에 대해서는 아마 안심하셔도 될 것이다. 그러나 저는 천사가 아니다. 천사와 같이 보지 말라. 사람은 다 실수를 한다. 우리 사람은 약하기 때문에 실수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실수를 변명하는 사람이 되기보다 두 번 다시 실수하지 않도록 자신을 쳐 복종시키고 하늘나라 갈 때에는 성화된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서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불신에 물들은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서도 비인격적으로 섬기려고 하고 있다.(딤전6:5)

그러나 하나님은 인격이 없는 분이 아니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신의 목숨까지도 기쁜 마음으로 내어 주시기까지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하시고 사랑하셨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들도 하나님을 대할 때에 마음과 성품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마 22:37-40)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의 인격을 걸고 우리를 구원해 주시겠다고 하셨으니 우리는 그 약속을 믿고 끝까지 의지하며 하나님의 인격을 존중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요 14:21, 히 6:16-18)



하나님의 본질 – 인격적인 하나님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에피 톤 데오 톤 존타)

성서의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움직이시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역사하신다. 하나님은 바로 이 역사하심으로 자신의 존재를 나타내시고, 이것으로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하신다. 구약성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잘 표현하고 있다. 그 이스라엘은 곧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장(場)을 제공하고 있다. 성서가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소개하는 것은 행동하시는 하나님,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말하기 위함이다. 하나님 앞에선 이스라엘은 언제나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요구받는다. 흔히 하나님을 인격적인 분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인격이라는 개념을 의인론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인격(person)이란 말이 라틴어의 persona(가면, 탈)에서 왔다면, 하나님의 인격성이란 역사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여러 가지 활동의 모습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그 인격성은 살아있음에 그 특징이 있다. 인격적인 하나님은 곧 살아계신 하나님이다.

성경은 하나님을 살아 행동하시는 '인격적인 신(神)'으로 계시해 줍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마26:63; 행14:15)이라는 뜻은 바로 하나님의 '인격성'을 강조한 고백입니다. 그리고 그 인격적이신 하나님은 우상들과는 달리 인간들의 뜻을 초월하셔서 자신의 거룩하신 뜻을 결정하시고, 섭리하시며, 이루어 나가십니다. 그와 같은 하나님의 '인격'을 살펴봄으로 하나님께 대한 지식을 더하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의 인격성에 대한 성경의 증언

1) 하나님의 인격적 요소들
우리는 '인격의 요소'를 '감정, 지성, 의지'로 봅니다. 성경은 그와 같은 세 요소를 하나님께서 지니고 계심을 보여 줍니다. 예민한 '감수성'을 지니시고(참조; 창6:6; 시103:8-13) 그 '감수성' 중에 가장 뛰어난 특징을 '사랑'(요3:16) 이라고 증언해 줍니다. 또 완전하신 '지성'을 소유하고 계시며(참조; 창18:19; 출3:7; 행15:18), 거룩하신 '의지'를 소유하고 계십니다(참조; 창3:15; 시115:3; 요6:38).

2) 인격적이신 하나님의 활동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인격'을 지니신 하나님께서는 인생들과 만물들에 대해 어떻게 행동하시고 계시는지 알아 보겠습니다.

첫째, 대화하기를 원하십니다(참조; 창1:3).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 즉 '인격성'을 따라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창조한 인생들과 인격적인 대화로 사귐을 원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대화'를 깨뜨리고, 거절하고 거부하는 것은 결국 '불신앙의 죄'인 셈입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성경'과 예언자를 통해서 '말씀'을 해오시고,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히1:1)하기를 원하신다고 성경은 증거해 줍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사귐'이 곧 '영생'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참조; 요일1:2,3).

둘째, 인생들의 행위를 보시고 듣고 계십니다(참조; 창11:5; 시94:9). 인생들이 자신의 행동과 삶을 책임져야 할 근거는 바로 인격을 지니신 하나님께서 인생사 모두를 듣고, 보고, 판단하고 계시는 데 있습니다.

셋째, 인생의 '불의'에 대해 진노하십니다(참조; 창6:6; 신1:37). 특히 인생들이 마땅히 섬겨야 할 하나님 대신에 인간과 물질과 세상의 허영들을 '우상화'하는 것에는 맹렬한 '질투'를 하신다고 했습니다(참조; 출20:5).

넷째,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이들에게는 따뜻한 마음으로 '자비'를 베푸십니다(참조; 시114:4). 이와 같은 인격적 특성을 지니신 하나님은 그 인격의 특성들을 따라서 만물을 창조, 섭리, 보존, 통치하십니다(참조; 행14:15; 느9:6; 시7:6,7).

2.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인격성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14:10).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한 제자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인격성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밝히 드러났습니다. 그 사실을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 주셨음
인생들의 '불의'에 대한 '거룩한 의분'(참조; 마23장), 또 한없으신 '긍휼심'(참조; 마9:36; 요5:6)은 바로 인생을 향하신 '창조주의 감정'을 보여 주신 예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감정은 '사랑'에서 기인된 것임을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여 주셨으니, 하나님께서 세상의 인생들을 사랑하시되 '독생자'까지 이 땅으로 보내 주셨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말구유에 누우신 아기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2)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지성'을 보여 주셨음
'산상 수훈'(마5-7장)을 읽어 보십시오. '너희 중에 죄없는 이부터 돌로 치라'시던 그 뛰어나신 '지성'을 생각해 보십시오(참조; 요8:3-9). 또 앞날에 대한 전지하신 통찰력들(참조; 마24장)은 모든 인간들의 지혜를 초월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지성'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특히 사탄과 인간들의 불의를 참으시고 끝까지 '골고다의 십자가'를 지신 것은 하나님께서 그 얼마나 거룩하신 '지성'의 소유자인지를 보여 준 예가 됩니다.

3)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의지'임
'인격적 존재'라는 의미는 한마디로 스스로 결단을 내리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와 같은 의미에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의지'그 자체입니다. '인생 구원'의 거룩하신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우주 최대의 '결단'을 내리신 사건이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이며, 또한 모든 악의 세력들의 도전과 훼방을 물리치시고, 또 '인성'의 한계도 극복하시고 십자가를 지신 '겟세마네의 결단'(참조; 눅22:42)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초의지적 행동'입니다.

3. 인격적이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조건들
그렇다면 그와 같은 '인격적 존재'이신 하나님과 교제를 맺으려면 우리 인생들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의 '믿음'입니다. 믿음은 '인격적 관계'를 가능케 하는 유일한 수단입니다. 이기적 '상업주의' 풍조에 물든 우리 인생들은 하나님마저도 그와 같이 비인격적으로 섬기려 하고 있습니다(참조; 딤전6:5). 그러나 하나님은 '인격'이 없는 '우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죄값으로 내주시기까지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인생들도 '마음과 성품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의 사랑에 전인격적으로 응답해야 합니다(참조; 마22:37-40). 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인격을 걸고 언약하신 그 '구원의 약속'을 의심없이 믿고, 그 언약을 끝까지 의뢰하며, 그 언약에 합당한 존재가 되기를 힘쓰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인격'을 존중해 드리는 것임을 유념합시다(참조; 요14:21; 히6:16-18).


하나님의 본질 1 – 영이신 하나님

하나님의 정체를 설명코자 하는 접근으로는 그 본질적 규명, 속성적인 접근, 그리고 구약에서 하나님이 갖는 명칭들과 신약에서 갖는 명칭들의 성격을 찾아봄으로써 가능하다. 하나님의 본질은 그가 영이시고 인격적인 존재이심을 우선 들수 있는데 하나님은 그 본질상유일하시고 스스로 계시는 자존자 이시다. 따라서 하나님은 영이신 까닭에 시간이나 공간의 제한을 벗어나신다.

하나님은 역사를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한 순간에 읽으시므로 그 역사를 경영하여 나가시며 인간의 삶이 영위되는 현재 세계는 물론 우주와 사후의 세계까지 통치하신다. 이러하신 하나님은 동시에 인격을 소유하고 계신다. 이러한 점에서 철학적 사고자들의 '막연한 궁극자' 또는 우주 밖에서 세상을 피상적으로 관찰하는 '절대자' 라는 개념의 신관과는 판이하다.

기독교에서 언급되는 성부 하나님은 유일의 하나님인 까닭에 자연주의의 범신론 이나 서방종교의 다신론과 구별되는 독특성을 갖는다. 더구나 인간들의 사고나 필요에 의하여 표상화되어지고 의미가 부여된 타종교의 신과는 달리 우리 하나님은 그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개시하여 주는 자존적 존재이시다. 기독교에 있어 나타나는 독특한 신관은 바로 이 하나님의 본질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나님의 속성을 살펴봄으로써 그 정체를 보다 적절히 이해할 수 있다. 먼저 하나님의 속성에 나열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분의 거룩성이라 할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자신의 이상 가운데서 하나님께 스랍들이 거룩함을 강조하여 찬양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참조; 사6:2). 하나님은 또 영원하여 시작과 끝이 없으시다. 이 영원하신 하나님은 전능성과 전지성을 겸유하고 계신다. 전능하시므로 무에서 유의 창조를 이끄셨으며 전지하시므로 자신의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들의 상태를 파악하고 계신다. 하나님의 전능성과 전진하심은 곧 그 운동 거취의 무소부재하심에 귀결된다.

하나님이 세상의 경영과 우주의 통치에서 일관되게 적용하여 오시는 원칙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과 공의의 선하신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속성에 내재된 자비와 진실하심, 그리고 변치 않으심은 이 실천들의 세밀한 구체화에서 나타나고 있다.

1) 하나님은 영이시니(프뉴마 호 데오스)
요한복음은 영(프뉴마)과 육(사르크스)을 구별하여 대립시킨다. 전자는 하나님의 영역을 나타내고 후자는 세상의 영역을 나타낸다. 육(사르크스)은 마귀(디아볼로스)나 세상(코스모스)과 같다. 반면에 하나님은 영(프뉴마)이시다. 인간은 언제나 양자 택일의 책임 앞에 서있다(참조; 요3:6). 즉 육(사르크스)은 차안적이며 인간적인 삶의 양식을 뜻하고, 영(프뉴마)은 피안적이며 신적인 삶의 양식을 뜻하는 것이다.

2) 신령과 진정으로(엔 프뉴마티 카이 알레데이아)
영이신 하나님은 그 예배하는 자들에게 영(프뉴마)과 진리(알레데이아)를 요구하신다. 영 안에서 예배한다는 것은 자기의 세계에서 즉 내면에 있는 하나님의 본성과 유사한 본성 안에서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세계 다시 말해 참된 실재의 세계에서 예배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 하나님의 참된 실재는 그리스도로 세상에 성육신하셨다. 참된 예배는 성육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그것만이 참된 예배 곧 진리의 예배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니'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신적 본질을 가장 적절하게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원래 히브리어<루아흐>로 묘사된 '영'은 '움직이는 바람'이라는 뜻으로, 죄로 물들고 또 유한한 인생들과 대비하여 하나님의 신적 본질을 강조하기 위하여 쓰인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움직이는 바람'처럼 '무형적 존재'이시며, 동시에 '행동하는 인격자'이시며, 또 '생명의 근원'이심을 '영'이라는 말로 표현한 것입니다. 함께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영'의 성서적 의미

1) '영'에 대한 일반적 인식
먼저 하나님을 '영'이라고 증언하는 성서적 '영'관을 생각하기 전에 우리가 혼동하기 쉬운 일반적인 '영'에 대한 인식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히브리어<루아흐>를 영어성경은 'Sprit'로 번역했고 한글성경은 그것을 '영'으로 번역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영적 존재'에 대해 살펴보면 첫째, 원시적인 관념으로서의 '영'관이 있습니다. 이는 모든 물체 안에는 '정령'들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우리나라에도 아직 그와 같은 원시적인 영관을 생각하는 것으로 우리나라에도 아직 그와 같은 원시적인 영관을 지닌 자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시골 교회에서는 집 뒷뜰에 있는 '나무'를 베는 일에도 목사님에게 기도를 부탁하는 집사님도 계십니다. 둘째, 미신적인 영관이 있습니다. 이는 죽은 사람의 '귀신'이나 '유령'을 '영'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셋째, 인간의 '영혼'은 불멸 하기에 그 '영혼'을 '영'으로 여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넷째, 한발 더 나아가 물질적 세계는 악하고 불안한 '미완의 세계'요 오직 보이지 않는 '본질적 철학의 세계'가 '영'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로 세계에 대한 관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수양으로, 철학으로, 종교적 노력으로 이 불완전한 세계를 탈피하여 어떤 이상적인 세계에 도달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세계를 '영적 세계'라고 여깁니다.

2) 성경적 증언
성경에서 '하나님은 영'이시라고 증언하는 것은 그처럼 인간들이 생각하는 '요정, 유령, 인간의 영혼, 이상적인 세계'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오직 하나님께만 있는 '신적인 특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신적인 특성'이라 한다면, 인간이나 인간 세계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하나님의 고유하신 본질'을 나타내는 말로서 '하나님은 영'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 '영'이신 하나님과 대비하여 유한한 인생들을 가리켜 '육적 존재'라고 했습니다(참조; 사31:3;롬8:7;롬9:3-5).

2. '영'이신 하나님의 특성

1) 무형적 존재이심
앞에서도 논의했듯이 '영'은 '바람'이라는 의미가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람'이 '무형'이듯 영이신 하나님은 '무형적 존재'이십니다. 결코 인간들의 육체적 '눈'으로는 볼 수가 없는 분이십니다. 요한 사도는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요1:18)라고 했고, 바울 사도도 그처럼 증언했습니다(참조; 롬1:20; 골1:15; 딤전6:16). 그렇다면 성경에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보았다는 증언들이 있는데(참조; 창32:30;출3:4;신34:10;사6:1) 그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그와 같은 말씀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실체'를 보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영광스런 상징을 통하여 가시적 형상으로 자신을 계시하신 것을 보았다는 뜻입니다(참조; 창18:1; 출24:9,10). 죄인인 인간은 본래적으로 하나님을 뵐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거룩은 죄를 용납치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2) 비물질적 존재이심
'영'이라는 뜻은 철저히 '비물질적'임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생들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하늘, 땅, 땅 아래 물 속'(출20:4,5)에 있는 어떤 '물질적 형상'으로도 생각하지 말 것을 경고하셨습니다. 물론 성경은 하나님께서 '손, 발, 얼굴'(참조; 창3:8;왕상8:29;시34:15;사65:2) 등은 가지고 계신 분으로 묘사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표현은 영이신 하나님을 '의인화'하여 우리 인생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도록 한 것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3) 생명의 근원자이심
'바람'은 '생명의 힘'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구약성경 겔1:12에는 모든 '생물'들이 '하나님의 신'에 의해 활동하고 있음을 환성적으로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다라고 하는 큰 의미는 만물과 인생에게 '생명과 힘'의 근원자가 되심을 나타내 주는 말씀입니다.

3. '영'이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조건

1) 예배의 대상으로 여겨야 함
'육'적인 존재인 인생은 오직 '영'적 존재이신 하나님께 '예배'할 수밖에 없는 '본문'을 지녔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인간의 이성이나 지혜로 만나볼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안에서 경배하고 신앙하는 자들만이 그 존재를 인식할 수 있습니다.

2) 신령으로 섬겨야 함
'신령'(요4:24)은 '인간의 정신'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비물질적 존재이시기에 결코 물질적인 그분을 섬길 수는 없습니다. 인간에게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해드릴 '헌물'이 있다면 바로 '정신'일 것입니다. 인간의 '사랑, 희망, 충성, 뜻'이 깃들어 있는 '정신'을 하나님께 드려야만 진정한 '헌신'이요 '영적 예배'(롬12:1)가 되는 것입니다.

3) 진리를 따라 섬겨야 함
'진실'(요4:24)은 바로 '진리'라는 뜻입니다. '진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참조;요1:17). '영'이신 하나님이시기에 비진리적인 인간적인 노력과 지혜와 수단으로는 하나님과 친교를 나눌 수가 없습니다. 오직 '육신의 모양'(롬8:3)으로 친히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은총을 믿음으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적 인격의 속성들

1. 하나님의 속성들과 이름들

(1) 이 교리를 고찰하는 목적 = 하나님을 아는 것

행17:(23)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요 4: (23)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2) 이 교리에 접근하는 방법

2. 하나님의 속성

(1) 하나님의 속성의 의미

[벧전 2: (9)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2) 하나님의 인격적 속성과 도덕적 속성

3. 하나님의 인격적(비공유적) 속성

(1) 영원성과 불변성

[시 90: (1)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2)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3)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4)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 (5)주께서 그들을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그들은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6)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 (7)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8)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에 두셨사오니 (9)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 (10)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11)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 (12)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13)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언제까지니이까 주의 종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14)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사 우리를 일생 동안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15)우리를 괴롭게 하신 날수대로와 우리가 화를 당한 연수대로 우리를 기쁘게 하소서 (16)주께서 행하신 일을 주의 종들에게 나타내시며 주의 영광을 그들의 자손에게 나타내소서 (17)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내리게 하사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우리에게 견고하게 하소서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견고하게 하소서

[시 102: (1)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나의 부르짖음을 주께 상달하게 하소서 (2)나의 괴로운 날에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내가 부르짖는 날에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3)내 날이 연기 같이 소멸하며 내 뼈가 숯 같이 탔음이니이다 (4)내가 음식 먹기도 잊었으므로 내 마음이 풀 같이 시들고 말라 버렸사오며 (5)나의 탄식 소리로 말미암아 나의 살이 뼈에 붙었나이다 (6)나는 광야의 올빼미 같고 황폐한 곳의 부엉이 같이 되었사오며 (7)내가 밤을 새우니 지붕 위의 외로운 참새 같으니이다 (8)내 원수들이 종일 나를 비방하며 내게 대항하여 미칠 듯이 날뛰는 자들이 나를 가리켜 맹세하나이다 (9)나는 재를 양식 같이 먹으며 나는 눈물 섞인 물을 마셨나이다 (10)주의 분노와 진노로 말미암음이라 주께서 나를 들어서 던지셨나이다 (11)내 날이 기울어지는 그림자 같고 내가 풀의 시들어짐 같으니이다 (12)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고 주에 대한 기억은 대대에 이르리이다 (13)주께서 일어나사 시온을 긍휼히 여기시리니 지금은 그에게 은혜를 베푸실 때라 정한 기한이 다가옴이니이다 (14)주의 종들이 시온의 돌들을 즐거워하며 그의 티끌도 은혜를 받나이다 (15)이에 뭇 나라가 여호와의 이름을 경외하며 이 땅의 모든 왕들이 주의 영광을 경외하리니 (16)여호와께서 시온을 건설하시고 그의 영광 중에 나타나셨음이라 (17)여호와께서 빈궁한 자의 기도를 돌아보시며 그들의 기도를 멸시하지 아니하셨도다 (18)이 일이 장래 세대를 위하여 기록되리니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여호와를 찬양하리로다 (19)여호와께서 그의 높은 성소에서 굽어보시며 하늘에서 땅을 살펴 보셨으니 (20)이는 갇힌 자의 탄식을 들으시며 죽이기로 정한 자를 해방하사 (21)여호와의 이름을 시온에서, 그 영예를 예루살렘에서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22)그 때에 민족들과 나라들이 함께 모여 여호와를 섬기리로다 (23)그가 내 힘을 중도에 쇠약하게 하시며 내 날을 짧게 하셨도다 (24)나의 말이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중년에 나를 데려가지 마옵소서 주의 연대는 대대에 무궁하니이다 (25)주께서 옛적에 땅의 기초를 놓으셨사오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니이다 (26)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 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27)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28)주의 종들의 자손은 항상 안전히 거주하고 그의 후손은 주 앞에 굳게 서리이다 하였도다

[약 1:(17)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하나님의 성품은 절대로 변하지 않지만, 하나님이 사람과 맺으시는 관계의 모습은 변한다.

(2) 편재성

[렘 23: (23)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가까운 데에 있는 하나님이요 먼 데에 있는 하나님은 아니냐 (24)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시 139: (1)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2)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3)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4)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5)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6)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7)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8)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9)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10)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11)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반드시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12)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이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 (13)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14)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15)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겨지지 못하였나이다 (16)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17)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18)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여전히 주와 함께 있나이다 (19)하나님이여 주께서 반드시 악인을 죽이시리이다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들아 나를 떠날지어다 (20)그들이 주를 대하여 악하게 말하며 주의 원수들이 주의 이름으로 헛되이 맹세하나이다 (21)여호와여 내가 주를 미워하는 자들을 미워하지 아니하오며 주를 치러 일어나는 자들을 미워하지 아니하나이까 (22)내가 그들을 심히 미워하니 그들은 나의 원수들이니이다 (23)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24)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하나님의 속성들은 경고이자 위로입니다.

(3) 전지하심

[시 147: (5)우리 주는 위대하시며 능력이 많으시며 그의 지혜가 무궁하시도다

[잠 15:(3)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

[시 147: (4)그가 별들의 수효를 세시고 그것들을 다 이름대로 부르시는도다

[마 10: (29)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출 3:(7)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눅 12: (7)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

[히 4:(13)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행 15: (18)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롬 11: (33)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4) 전능하심

[엡 1: (11)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창 18: (14)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눅 1: (37)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창 1: (3)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엡 1:(19)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20)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5) 절대적 복되심

[딤전 1: (11)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 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름이니라

하나님 자신의 지식과 사랑의 대상은 바로 하나님 자신의 완전함이라는 사실입니다.

(6) 영광

[왕상 8: (11)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말미암아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함이었더라

[딤전 6: (16)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

하나님의 도덕적 속성들

1. 하나님의 도덕적(공유적) 속성

(1) 거룩하심(=일차적으로는 분리, 즉 악으로부터의 분리를 의미함)

성경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말한다.

→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온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절대적인 거룩하심에 감명을 받았습니다.(모세,욥,이사야,에스겔)

(사40:25)거룩하신 자가 가라사대 그런즉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기며 나로 그와 동등이 되게 하겠느냐 하시느니라

(벧전1:16)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 구약은 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그 거룩하심의 결과로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계시입니다.

율법과 성막과 제사를 주신 목적이 무엇인가? “너희는 거룩한 백성이고 나는 거룩한 하나님이다.”

(합1:13)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참아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궤휼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되 잠잠하시나이까

(요17:11)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요일1:5)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시71:22)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또 비파로 주를 찬양하며 주의 성실을 찬양하리이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주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행4:27)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행3:14)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 십자가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가장 숭고한 선포이며 계시입니다.

거룩하심 계시의 목적 = 하나님께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가르쳐준다

(히12:28)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출19:16)제 삼일 아침에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심히 크니 진중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 (출19:17)모세가 하나님을 맞으려고 백성을 거느리고 진에서 나오매 그들이 산 기슭에 섰더니 (출19:18)시내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점 연기 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출19:19)나팔 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 모세가 말한즉 하나님이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 (출19:20)여호와께서 시내산 곧 그 산꼭대기에 강림하시고 그리로 모세를 부르시니 모세가 올라 가매 (출19:2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려가서 백성을 신칙하라 백성이 돌파하고 나 여호와께로 와서 보려고 하다가 많이 죽을까 하노라 (출19:22)또 여호와께 가까이 하는 제사장들로 그 몸을 성결히 하게 하라 나 여호와가 그들을 돌격할까 하노라 (출19:23)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주께서 우리에게 명하여 이르시기를 산 사면에 지경을 세워 산을 거룩하게 하라 하셨사온즉 백성이 시내산에 오르지 못하리이다 (출19:24)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가라 너는 내려가서 아론과 함께 올라 오고 제사장들과 백성에게는 돌파하고 나 여호와에게로 올라오지 못하게 하라 내가 그들을 돌격할까 하노라 (출19:25)모세가 백성에게 내려가서 그들에게 고하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죄의 참된 개념을 가르쳐 준다.

→ 죄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로 나아가야 합니다.

“비열하고 죄로 가득한 나여!” 

당신이 정말로 하나님의 임재 안에 들어가 그의 거룩하심에 대한 개념을 조금이라도 갖게 된다면, 당신은 즉시 자신이 비열하고 끔찍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 당신 자신의 죄성을 인식하는 방법은 당신의 행실이나 삶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 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p133)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속죄의 필요성을 보여준다. = 십자가의 이중적 의미(거룩과 속죄)

(2) 의로우심(공의로우심)

의(공의)라는 의미(=하나님이 우리와의 관계 가운데 나타내신 하나님의 거룩하심)

→ 하나님의 의는 거룩함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며, 하나님의 공의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혐오하심

하나님의 의와 공의가 드러나는 다양한 영역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때>

(요3:36)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엡2:3)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요일1:9)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용서)

(롬3:25)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하나님은 언제나 자신의 말씀을 지키신다>

하박국의 메시지=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공의로우시다.

<의로운 자들에게 상주심>

(딤후4:8)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의로우심과 절대적 공의를 나타냄> → 하나님은 죄인들을 의롭다고 선포하시고 그들을 의롭게 만드십니다.

(롬3:25)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3) 선하심과 사랑(순서에 주의 : 거룩함>의와 공의>선하심과 사랑)

선하심과 사랑의 구분

(롬11:22)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바 되리라

(시145:9)여호와께서는 만유를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

하나님은 자신의 피조물에게 선하심과 사랑을 나타내신다.

(마5:45)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마6:26)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행14:17)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은혜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의 표현이다.(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심 혹은 사랑)

(딛2:11)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자비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의 표현이다.

(눅1:54)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눅1:78)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을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롬9:18)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인내와 오래 참으심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의 표현이다.

(롬2:4)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롬9:22)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벧전3:20)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명 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벧후3:15)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 하나님이 완악하고 악한 자들을 참으신다는 의미입니다.

(4) 신실하심

→ 하나님이 신실하시다고 말할 때 그것은 그분이 당신이 안전하게 기댈 수 있는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갑자기 손을 놓아 버리거나 당신을 저버리리라는 의심은 조금도 없이 당신이 절대적으로 의존할 수 있는 분, 당신이 의지할 수 있는 분, 당신이 안전하게 머물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36:5)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 주의 성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으며

(사55:11)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

(고전1:9)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살전5:23)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살전5:24)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요일1:9)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자신을 맡기고 마귀에게 말하십시오.

당신이 이미 죄사함 받았다는 것을, 당신의 죄를 이미 자백했다는 것을, 그리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당신이 용서받은 것을 보장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말하십시오.

믿음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매달리는 것

(막11:22)예수께서 대답하여 저희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허드슨 테일러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매달리라”

그렇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당신 자신 안에 믿음이 없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매달리십시오.

2. 하나님의 속성을 살펴볼 때 주의할 사항

하나님을 생각할 때 그것들 중 어느 하나라도 따로 분리시켜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동시에 그 모든 속성을 전부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의 속성을 다른 속성과 대치시켜서는 결코 안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면서 언제나 그리고 동시에 자비로우십니다.

→ 그분의 사랑은 거룩한 사랑입니다.


반틸 - 하나님은 한 인격(one Person)이시다
반틸(Cornelius Van Til)은 '숫자적인 단일성'을 강조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being)가 절대적으로 하나의 숫자적인 동일성(an absolute numerical identity)을 현시한다고 주장해야 한다.
심지어 존재론적인  삼위일체내에서도 우리는 하나님께 숫자적으로 하나이시라고 주장해야 한다.
그는 한 인격이시다(He is one person).
우리가 한 인격적인 하나님(a personal God)을 믿는다고 말할 때, 우리는 단순히 인격성(personality)이라는 형용사가 붙여질 수 있는 한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실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인격성을 가지신 어떤 본질(an essence)이 아니라 절대적인 인격체이시다.


그렇지만 한 인격의 존재(being)안에는 우리는 성경에 의해 존재(being)의  어떤 구체적인 유형이나 또는 유적 유형(generic type) 안에서,
또 세 위격적 실재들(three personal subsistences) 사이에서 구분할 수 있고 또 그렇게 구분하여야만 한다." (Cornelius Van Til, An Interoduction to Systematic Theology(Phillipsburg, NJ:Pre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 c. 1974) .pp 229-230.







하나님의 인격성은 성경의 여러 부분에서 언급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격성은 여러 가지 면에서 발견된다.

하나님의 인격성은 하나님이 스스로 여러 가지 목적을 정하시고 그 목적을 실현한다는 점에서 발견된다.
 우주의 창조, 인간의 창조, 가인의 저주, 홍수, 민족의 조상으로서의 아브라함의 선택, 야곱과 그의 아들들의 생애, 애굽에서의 복역,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 왕정의 시작, 국가의 멸망, 포로생활과 해방 등은 결코 우연한 사건들이라고 할 수 없다.
  이 사건들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작정된 거룩한 목적의 결과였고, 하나님의 뜻의 실현이었다(창1:1, 17:8).

 

 하나님의 인격성은 하나님이 윤리적 자유를 가지고 있다는 데에서 발견된다.

그리고 이 윤리성은 하나님이 인간들 가운데에서 계속적으로 정의를 찾으려 한다는 점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이 사실을 분명히 깨닫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정의를 강조하였다. 하나님의 정의는 인간이 올바르게 행동하고 자비를 사랑할 것을 요구한다.

 인간이 하나님의 정의를 인식하는 데에는 항상 윤리적인 복종이 요청되었다.

인간은 그러한 요청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여 수행하든가 완강하게 거부하든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창12:1-5, 22:1).

 

 하나님의 인격성은 소위 신인동형론적 기능에서 발견된다.

하나님은 걸어가시고, 말씀하시고, 미워하시고, 책망하시고, 분노하시고, 질투하시
고, 자기가 선택한 자를 사랑하신다(출20:5, 시7:11, 사45:5).
 성경의 표현에 의하면 하나님은 얼굴과 손과 등과 호흡기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의 인격에 대한 피상적인 설명에 불과하긴 하지만, 하나님의 인격성을 밝혀 주는 데 있어서 나름대로 중요한 구실을 한다.

 하나님의 인격성은 종교적인 경험에서 발견된다. 모든 종교 경험은 인격적인 하나님을 지향한다.

인간의 예배와 기도는 인격적인 존재를 전제로 하고 있으며, 그러한 행위를 통하여 인격적인 존재자의 실존이 증명되어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