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관심


하나님의 관심

하나님은 무슨 일에 가장 큰 관심을 갖고 계실까요?
성경에 하나님의 최대의 관심은 구원에 있다고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최고의 관심은 세상 사람들의 영혼 구원에 있습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도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모든 사람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든 안 믿든 모든 사람에게 있습니다.
부자든 가난하든, 많이 배웠든 적게 배웠든, 나이가 많든 적든, 정상인이든 장애인이든 하나님의 관심은 사람 자체에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마 5:45)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은 차별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쏟으시면서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의 종말에는 천국과 지옥으로 나눌 것이지만,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이 바라고 원하시는 최고의 소원은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사람에게 있고 인간을 구원하시는 것이 최고의 기쁨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고 하였습니다.

먼저 믿은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관심을 나의 관심으로 삼고 살고 있나요?
아니면 아직도 내 자신에게만 관심을 두고 살고 있지는 않은지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은 주로 이 세상에 있고, 나에 관한 것에 있고, 육신적인 문제에 있지만, 예수님을 믿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관심은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구원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과 소원이 곧 나의 관심과 소원이 되어 하나님의 쓰임을 받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관심!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관심!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안타까운 것은 “돈을 벌려다 건강을 잃고난 후 건강을 되찾으려고 그 돈을 다 잃어버리는 것.” “장래를 위해서만 살다가 현재의 삶도 미래의삶도 모두 헛되이 잃고 마는것.”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살다가 영원을 준비하지 못하고 죽는 것.”
하나님께서 부드러운 음성으로 하시는 말씀은 “사랑하는 이에게 깊은 마음의 상처를 주는 것은 단 몇초 밖에 걸리지 않으나 그 상처가 아무는 데는 여러 해가 걸릴 수도 있단다.” “부유한 사람은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적은 것에 감사하고 만족하는 사람이니라.” “내가 여기 네곁에 이렇게 늘 함께 있다는 것을 잊지말아라.”

아버지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우리를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하는 자녀들이 되도록 계획하셨습니다. 성자 하나님께서 아들의 영광을 내려놓으시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영원히 사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회개하고 십자가의 구원을 받아들이게 하셔서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자녀들로 인쳐주셨습니다.

이제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관심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보이는 세상의 복만을 위해 살며, 잠시 행복만을 즐기려는 것을 안타까워하십니다. 보이지 않는 영원한 상주심을 위해 잠시 고난과 수고를 기꺼이 감당하려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어른이 되었을 때에, 바로 왕의 공주의 아들이라 불리기를 거절하였습니다. 오히려 그는 잠시 죄의 향락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학대받는 길을 택하였습니다. 모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모욕을 이집트의 재물보다 더 값진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는 장차 받을 상을 내다보고 있었던 것입니다.”(히 11:24-26)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된 우리가 가진 세상의 것들에 관심을 가지고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많은 재물과 높은 지위와 권세, 건강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일반 은총입니다.
하나님께서 관심을 가지고 원하시는 것은 상처를 준 사람이라도 무조건 용서하고 사랑하려 하고, 적은 것에라도 그져 감사하려 하고, 힘든 때에라도 하나님께서 늘 함께 하심을 믿고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의지하려 하는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사랑은 우리의 허물에도 불구하고 변함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 흘리신 보혈은 우리의 모든 죄를 씻는 위대한 능력이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베푸시는 축복은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뿐 아니라 보이는 세계에서도 말로 다할 수 없이 풍성합니다. 축복받을 그릇을 준비하십니다!


하나님의 관심 회복하기

교회에 어려운 사람들이 찾아와 재정이 많이 필요하다고 말하자 한 성도가 그것은 교회가 하는 일이라고 답변하는 것을 들었다. 얼마나 아름다운 대화인지 모른다. 만일 교회가 성도들을 숫자로만 생각한다면 성도수 자랑, 건물과 헌금 자랑, 또는 힘자랑으로 부패될 것이다. 예수님은 성도들을 숫자로 생각지 않으시고 개개인의 이름을 불러주신 것을 성경을 통해 잘 알고 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고자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내가 갖고 있는 것이 아닌 나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고 이름을 부르는 분이다.

그렇다. 하나님의 관심은 언제나 인간사랑, 오직 우리에게 있다. 하나님은 온통 우리를 위해 전전긍긍하시며 일하고 계신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 사람들은 그 사람의 죄에 대해 관심을 가졌지만 예수님은 죄보다 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고 죄를 치유해주셨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 자체보다는 그 사람이 무엇을 가졌는가에 관심을 갖고 대할 때가 많아 관계가 불행해진다.

또한 예수님의 관심은 제자에 있었다. 12명의 사도를 세우셨고, 70인의 제자를 세우셨음을 보게 된다. 예수님의 관심이 여러 부분에 있었던 것 같지만 가장 큰 관심은 사람에게 있었고 그 사람이 하나님나라의 일꾼 즉 제자가 되도록 도우셨다. 사람들의 관심은 자신의 이익추구였지만 예수님은 하나님나라를 이루고 복을 누릴 사람에게 있었던 것이다.

유진 피터슨 목사는 ‘하나님, 저는 사람이 너무 싫습니다. 인간들이 너무 나를 괴롭힙니다. 저 인간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 주님께서 말씀하기를 원하시는 것을 제가 듣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그때 하나님은 두 가지를 깨닫게 하셨는데 하나는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인 그분의 최고의 관심의 대상이요, 둘째는 개개인은 하나님이 만든 걸작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러니 너도 하나님의 관심을 따라 목회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요나는 자기가 싫어하는 니느웨 성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철저히 외면하고 찾아가라는 명령에도 회피하며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시켰다. 우리도 자기 이익에 맞지 않거나 싫어하는 사람을 대할 때 여러 합리화를 갖고 무관심하거나 미워한다.

우리는 과연 한 사람이 교회에 찾아왔을 때 하나님 품으로 돌아왔다고 기뻐하는가, 아니면 교회의 조직체에 들어와 어떤 유익이 있을까를 계산하고 있는가? 주변에는 우리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어려운 이웃들이 많다. 북쪽에는 복음과 축복이 필요한 형제들이 있다. 눈을 들어 이 땅의 민족들을 보면 하나님의 관심이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많은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관심은 ‘무엇’이 아니라 ‘누구’입니다


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며 멸시하며
너희 성희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랫 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아모스 5:21-23)

좋아하는 후배와 점심을 함께 할 때 그는 살면서 일어난 재밌는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아내가 새벽기도를 간 사이 한 번도 깨지 않던 젖먹이 아이가 우는 바람에 그날은 새벽잠을 설쳤다고 했습니다. 후배는 아이가 칭얼대자 엄마 젖을 빨며 편안히 자던 아이를 생각해 아빠의 젖을 물렸나 봅니다. 하도 급하니까 시도했던 모양인데 어디 통할 일입니까! 같은 경험이 있는 선배로서 한마디 했습니다.

“아이가 찾은 것은 젖이 아니라, 바로 엄마이지!”

예수님과 사마리아 수가 성 여인의 대화에서 여인의 관심은 예배하는 장소, 시간 등 외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이 찾으시는 보이지 않는 영적 예배에 대해 지적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무엇’(what)이 아니라 ‘누구’(who)입니다. 영적인 찬양은 드리는 찬송, 즉 음악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드리는 자의 마음가짐과 자세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기도와 찬양에 대해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 (고전 14:15)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인 표현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현대 크리스천들에게는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그들의 심령은 무지와 습관 때문에 바리새인처럼 경건하지 못한 경우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찬양한다면서 실제의 모습은 하나님 밖에서 역사나 전통을 고수하는 자가 되기 쉬운 것입니다.

경건한 음악을 찾기 위해 고전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도대체 고전이란 무엇이며, 고전시대에 음악을 만든 크리스천들이 추구했던 경건 사상과 현대인들이 추구하고 있는 경건 사상의 본질은 서로 다른 것인지 질문해야 합니다. 그때의 음악은 성경이 말하는 음악 형식과 동일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관심은 특정 시대의 작품 스타일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변화된 심령으로 드릴 수 있는가 입니다. 우리는 전통을 고수하는 자, 경건의 모양만을 갖춘 보수주의자가 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고수하여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내적 보수주의자가 되어야 합니다.

에베소서 5장 18-20절은 음악의 목적과 기능을 규정하기에 앞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말씀합니다. 성령의 도우심 없이 우리는 영적인 찬양을 하나님께 드릴 수 없습니다. 골로새서 3장 16절의 첫 구절인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는 예배에서 선포되는 말씀이 그리스도 중심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리(진정)와 이해(마음) 없이는 찬양의 가치가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진리로 드리는 찬양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입니다. 다시말해 하나님이 찾으시는 드리는 심령을 강조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찬양은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합니다. 어느 하나라도 결핍된 찬양은 균형을 잃어 조화를 이루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찬양에는 신령과 진정의 균형이 요구됩니다.

찬양하는 사람의 마음가짐과 자세는 진지하고 열정적이어야 하며, 또한 진리에 기초해야 합니다. 아무리 인간이 보기에 아름다운 찬양이라 하더라도 드리는 자의 마음이 하나님의 관심인 ‘신령과 진정’ 밖이라면 쓸데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쫓아가야 합니다. 그것은 형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용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무엇’이 아니라 ‘누구’입니다. 영적인 찬양은 음악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드리는 자의 마음가짐에 달려있습니다. 찬양하기에 앞서 당신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최선의 찬양을 위하여

1. 에베소서 5장 18-20절과 골로새서 3장 16절을 비교해 보십시오.
2. 하나님의 관심은 무엇입니까?
3. 거룩한 찬양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의 관심(요한복음 3:16-17)



흔히 사람은 무엇에 관심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모습이 결정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관심은 바로 그 사람이 무엇에 끌리고 무엇을 사랑하느냐고 하는 방향을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흔히 육체적 본능에만 이끌려 살아가는 사람을 두고는 동물적 수준의 사람이라고 말들 합니다. 반면에 행동하기 전에 생각이 앞서고, 그리고 그 생각에 따라 자기의 모든 것을 복종시켜가며 사는 사람이라면 바르게 가르침을 받은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사실, 먹고 입고 사는  이러한 육신적인 생활이란 어떤 사람이든 너나 할 것 없이 별로 큰 차이가 없는 거기가 거깁니다. 특별히 유별날 것이 따로 없는 대동소이(大同小異)한 모습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사람의 생각이요, 그 생각과 관심일 것입니다. 즉, 생각의 바탕, 생각의 고향 즉, 그 사람의 관심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인간됨의 가치기준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우리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와 성장에 관하여 매슬로우(Maslow)라는 발달 심리학자가 발표한 이론이 있습니다.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는 육체적인 욕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먹는 것이 문제가 되고, 아울러 생리적인 욕구가 문제가 됩니다. 이것은 동물적인 것입니다. 이 동물적인 욕구가 충족되고 나면 그 다음으로는 안전의 욕구가 있다고 합니다. 고통과 공포와 위협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며, 되도록이면 편안하게 살고 싶어 하는 욕구입니다. 이러한 욕구 다음에 오는 것이 바로 소속의 욕구입니다. 친구가 있어야 하고 친구로부터 사랑 받기를 원하는 바램을 갖게 됩니다. 모임에 끼어들기를 바라고 거기서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인정받지 못하면 소외감을 느낍니다. 이런 소속의 욕구가 어느 정도 채워지고 나면 자기 존중의 욕구 즉, 자기실현의 욕구가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항상 자기 존재를 확인하려고 합니다.

사람의 행복이란 이렇게 자기의 욕구가 채워지는 데에서 확인이 됩니다. 육체적, 생리적 욕구가 채워짐으로 행복해 하던 사람도 어느 정도 성장하고 성숙해지게 된다면, 안전의 욕구, 소속의 욕구를 채우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욕망이 채워져야 행복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습 중에 가장 깊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바로 자기 존재를 확인함으로 행복함을 갖게 되는 자기실현의 자리입니다. 이렇게 사람은 성숙해짐에 따라 관심도 달라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은 자기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가에 따라 행동여하, 추구하는 삶의 농도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관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오늘, 10월 9일은 우리 한국에서는 한글날로 지키는 날입니다. 세종대왕께서 한글을 창제하신 날을 기념하여 제정한 날입니다. 이러한 세종대왕의 업적으로 우리 민족은 우리만의 고유한 글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귀하고 장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세종대왕께서 왜 다른 할 일도 많이 있었을 텐데, 굳이 한글을 만드실 생각을 하셨을까요? 여러분들께서도 잘 아시는 것처럼, 세종대왕께서는 한글을 만드신 이유를 훈민정음(한글의 옛말) 서문에서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말이 중국말과 달라서, 한자와는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이런 까닭에 어진 백성들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그 뜻을 담아서 나타내지 못하는 사람이 많으니라. 내가 이것을 딱하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들어 내놓으니,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쉽게 깨우쳐 날로 씀에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우리는 여기서 세종대왕께서 한글을 만드신 이유를 발견합니다. 그것은 “내가 이것을 딱하게 여겨”라는 말씀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이를 원문대로 읽으면 “내가 이를 어엿비 여겨”라는 말인데, 이 “어엿비”란 말은 “불쌍히 여겨” 즉, “사랑하는 마음으로”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세종대왕께서 한글을 창제하신 이유는 바로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며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서 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세종대왕의 관심은 백성들에게 있었고, 그것도 이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한글창제라는 귀한 일을 해 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 사람의 관심이 사랑과 연결되게 된다면, 여기에는 그 사랑이 역사하는 놀라운 일이 만들어지는 귀한 모습을 이루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세종대왕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질문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나의 관심은 어디에 있느냐고 말입니다.

물론 사람마다 처한 환경이나 처지에 따라 관심이 다를 수 있지만 모든 인간의 공통적인 관심은 생명의 문제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뭐니 뭐니 해도 머니(Money)가 최고”라고들 말하지만 사실, 이러한 돈의 가치의 문제는 생명의 문제가 전제되어 있을 때 이야기일 것입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생명에 위협을 받고 있는 상황이라면, 그 돈은 아무 쓸데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모든 인간의 공통적인 관심은 바로 생명의 문제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건강의 문제가 아주 중요하게 취급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우리 모든 인간의 공통적인 관심사인 생명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쩌면 우리 인간 자신보다 인간의 생명에 더 깊은 관심을 가지신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가인(Cain), 그가 자기 동생 아벨(Abel)을 죽이고 나서 어떻게 했습니까? 자기 동생을 죽인 가인이었지만 자기 자신은 살고 싶어 했습니다. 사람의 생명을 앗아간 사람으로서 자기 자신은 살고 싶어 했다는 염치없는 모습을 봅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러한 염치없는 가인을 어떻게 했습니까? 사람을 죽이고도 자신은 살고 싶어 하는 가인을 하나님은 살게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의 생명을 죽음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하나님의 깊으신 배려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배려는 살인하지 못하도록 율법을 제정하심으로 인간의 생명을 보존하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 자신의 공통적인 관심사가 인간의 생명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과 우리 인간의 공통적 관심사인 인간의 생명에 대해서 그 생명을 대하는 내용에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인간의 생명에 대한 관심은 이 생명을 연장하려고 한다든지, 병 때문에 생명에 위협을 받지 않도록 건강하게 하려고 한다든지 하는 그러한 현실적 관심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가지시는 인간의 생명에 대한 관심은 좀 다른 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명이 “영원한 생명(The Eternal Life)” 곧 “영생”이 되도록 하는데 지극한 관심을 갖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이 “영생”이라는 말은 우리의 현실 생활 속에서는 씌어지는 말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말을 사용하거나 이해하고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어려움이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어려움은 결정적으로는 하나님이 인간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셔야만 할 만큼 우리 인간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인간의 생명이 이렇게 현실적 가치와 영원한 가치로 첨예하게 대립되는 한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입니다. 그 당시,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  양옆에 있는 십자가에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가는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편의상 이들을 두 강도라고 표현합니다. 이렇게 세 사람이 십자가라는 참혹하고 끔찍한 고통 속에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솔직히 한 마디의 말도 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기도 어려운 고통 속에서 있는 힘을 다하여 이들이 한 말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한 강도는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였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 강도는 이렇게 말하는 동료를 꾸짖으면서, “네가 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느냐? 우리는 우리의 죄 값을 받는 것이라 당연하지만, 이 사람은 그러하지 않아. 이 사람은 잘못 행한 것이 없어”하면서 예수님을 바라보며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라 하였습니다. 이 두 강도의 모습에서 생명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와 관점을 봅니다. 한 강도는 생명을 현세적 가치로만 보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한 강도는 영원한 가치로 보았습니다. 어떤 차이입니까? 현실적 가치로 본 사람은 생명을 당대의 것으로만 보았다는 것입니다. 즉, 죽으면 끝나는 것으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영원한 가치로 본 사람은 생명을 당대로만 국한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아도 좋겠습니다만, 예수님은 누구에게 응답하셨는가를 보십시다. 그것은 생명을 영원한 가치로 본 사람에게 응답하십니다. 그래서 “내가 진실로 당신에게 말합니다. 오늘 당신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라고 대답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억하세요. 우리의 생명이 당대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이 말은, 우리는 죽음 후의 모습에만 관심을 가져야한다는 그런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이 말씀은,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우리가 지니고 있는 나의 생명을 영원한 가치로 대할 수 있는 변화된 사고와 자세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한 순간이라도 하나님과 연결되어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젖줄과 연결함으로 살아야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여러 가지로 표현을 합니다. 기술 과학 문명이 가장 발달된 세상, Post Modernism의 세상 등등. 그런데 종교적으로 현대를 표현하기를 “성숙한 세상”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말은 2차 대전 당시 독일의 신학자요 목사인 디이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라는 사람이 사용한 단어입니다. 본회퍼는 “장차 올 세상은 성숙한 세상”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본회퍼가 언급하는 이러한 성숙한 세상이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의 역할이 점점 줄어지고 인간의 역할이 점점 더 많아지는 세상이란 뜻입니다. 즉, 교회의 역할은 점점 축소되고 이 세상의 역할이 점점 커진다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몸이 아프면 교회를 찾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병원을 찾습니다. 옛날에는 동네에 무슨 문제가 생기면 마을 주민들이 교회에 모여 목사를 중심으로 의논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변호사를 찾아갑니다. 옛날에는 비가 많이 오거나, 아주 안 오면 교회에 나아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오늘날에 만일 이런 식으로 처신하면 오히려 미신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렇게 많은 부분이 하나님의 영역에서 세속의 영역으로 이전되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앞으로는 더할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인간의 생명을 이해하는 데에도 많은 변화를 예고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신체의 부분들을 만들어, 못쓰게 된 부분은 바꿀 수도 있는 세상이 온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유전자를 조작하여 인간의 생명까지도 탄생시킬 수 있다는 주장까지도 나오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인간의 생명을 아주 오래오래 연장시키는 날이 온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이렇게 해서 태어나고 오래 산다고 해서 그 사람이 예수님을 점점 더 많이 닮아갈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신앙심 깊은 사람의 유전자를 이식한다한들 그 사람이 예수님의 형상대로 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인간의 생명에 관심을 가져야 하겠지만, 이 인간의 생명이 영원한 생명으로 자리매김을 할 수 있는 데에까지 그 관심이 이어져야 할 것입니다. 이는 성숙한 세상에서도 고유하게 하나님의 영역으로 남아있는 부분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만 이 영생이 허락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생명을 지니고 있는 가운데에서 영생이라는 하나님의 관심에 끊임없이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 인간에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시는 일을 스스로 감당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행위는 바로 우리 인간의 생명이 하나님의 차원으로까지 끌어 올려져야 한다는 사실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생의 한 의미인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바로 이렇게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고, 인간의 생명에 관심을 가지심으로 인간이 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관심은 어디에 있어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17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말씀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궁극적 관심은 이 세상을 구원하는데 있습니다. 요 3:16은 우리 자신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관심이라면, 요 3:17은 이렇게 구원받은 우리를 통하여 이 세상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궁극적 관심이 나타나 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구원을 받는 그 일에 우리의 관심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바로 이러한 부르심에 응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관심에 동참하여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을 나의 관심으로 여기는 모습으로 우리의 주변의 삶에 사랑의 기적을 일으키는 주님의 제자들이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