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방주(베드로전서 3: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명 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
히브리서 11: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
노아 방주의 참된 의미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는 믿음 안에 세워지는 하나님의 나라
노아시대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두 말 할 것 없이 방주다.
방주(테바)에 들어간 자는 살고, 방주를 거부한 자는 다 죽었다.
“이 방주가 신학적으로 어떤 의미일까”라고 누가 묻는다면 당신은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만약 “교회”라고 대답했다면 당신은 올바른 답을 했다.
대부분이 그렇게 배워왔고, 또 그렇게 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라고 답했을 때 그 “교회”의 의미를 더 깊이 함께 나누어 본다면 많은 사람들이 대답한 교회라는 답이 틀린 답이 될수도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곳에 들어가는 자는 살고 그렇지 않는 자는 죽는, 그렇게 목숨이 달린 중요한 곳이라면, 그리고 그 방주가 교회를 의미한다면 그런 “교회”가 가지고 있는 의미는 “분명히” “정확하게” 파악되어야만 한다.
교회라고 대답했을때 그 교회가 의미하는 바는 대답하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개교회(individual church)주의자들은 매 주일 자신이 다니는 교회를 생각하며 답했을 것이고, 개인영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개인의 몸이 성전이라는 차원에서 각자가 교회라는 의미로 답했을 것이고, 공동체를 강조하는 사람들은 성도들의 모임 자체가 교회라는 의미로 답했을 것이고, 로마 카톨릭의 신도들은 전 세계 도처에 흩어져 있는 모든 성당들의 전체 모임 자체라는 의미로 교회라 답했을 것이고, 보편교회(universal church)의 의미를 더 많이 생각하는 사람들은 전 세계의 모든 교회 전체라는 의미로 답했을 것이고…
방주로 이끌지 않으면 물에 빠져 죽는다는 생각을 할 때 방주의 의미와 동일한 교회의 참된 의미는 분명히 개교회주의나, 교단주의나, 교파주의, 혹은 교회가 갖는 지엽적인 제한성에 빠져서는 안 될 것이다. 교회가 갖는 많은 의미 가운데 한 두 가지의 지엽적 의미로 방주의 의미를 국한시킨다면, 그렇다면, 교회 밖의 사람들은 다 물에 빠져 죽는다는 말인가? 분명히 우리가 갖고 있는 교회의 개념은 정확하게 재정립되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갖고 있는 교회 의미 밖에 있는 사람들은 다 지금 물에 빠져 죽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좀 더 심하게 말하면, 우리는 “내가 생각하는” 교회 밖의 사람들을 방주 밖으로 끌어내어 물에 처 넣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의미에서 “방주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라는 질문에 다시 답해 볼 필요가 있다. “방주”는 “교회”라는 답은 개교회주의, 교단주의, 교파주의가 만연하는 오늘날의 지상교회시대에서는 오해되기가 쉬운 표현이다. 오히려 방주는 “예수”를 의미한다고 하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나라”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깊은 대답이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쉽게 생각해도 될 문제를 내가 이렇게 걸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바로 교회의 참다운 의미, 사명을 다시 한번 더 나누고 싶기 때문이다. 이런 말이 있다. “오늘날 전도의 가장 큰 방해물은 바로 교회이다”(The biggest obstacle for evangelism today is church). 부인하고도 싶고, 받아 들이고 싶지도 않은 표현이지만 실제로 현 상황이 그러하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 때문에 사람들은 교회 오기를 거부하고, 교회 다니는 사람들 때문에 교회를 떠나는 경우가 현실적으로 많이 있다. 이런 씁쓸한 유머가 있지 않는가? 캘리포니아 지역에는 한인 노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 어느날 노인들이 관광버스를 대절해서 여행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여행중 두 노인이 싸우게 되었다. 아무리 말려도 싸움을 멈추지 않자 한 노인이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여기가 교회도 아닌데 왜 싸우느냐고…”
교회의 존재이유는 무엇인가? 교회의 목표는 무엇인가? 그것은 교회성장이 아니다. 우리가 말하는 교회부흥이 아니다 – 물론 교회부흥은 원리적으로 맞는 말이긴 하지만 그 말의 동기를 자세히 살펴보면 참다운 의미의 교회부흥이 아닌 경우가 많다. 개교회 부흥이 교회의 참된 목표인가? 교회의 궁극적인 목표는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다. 그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해서 개교회가 약해지고, 심지어 “없어지게 되더라도” 그 교회가 속한 지역사회에 하나님 나라가 건설된다면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것이 과연 소금과 빛이라고 일컬어지는 교회가 궁극적으로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소금은 그저 소금으로 있을 때가 아니라 음식 속에서 자신이 없어짐으로 그 음식을 싱싱하게 유지시킬 때 “소금다운” 것이다. 빛도 자신이 타 들어감으로써 어둠을 밝힐 때 빛답다고 할 수 있다. 환한 대낮의 양초불은 아무런 역할을 못한다. 깜깜한 어둠 속에 있는 불은 아무리 작은 양초라도 그 역할을 다하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가 내적 성장으로 인해 그 모습이 건재하다면 감사할 일이지만, 그것이 지역사회의 아픔과 어두움에 별 영향을 못 미치는 성장이라면 그 교회를 참다운 교회라고 할 수 있는가? 결과는 하나님이 하실 일이다. 그러나 교회는 교회로서의 사명감당에 충실해야 한다. 세상을 향해, 지역사회를 향해 몸부림치는 교회의 모습이 없다면 본질적 의미의 교회, 하나님 나라 건설을 목표로 하는 교회가 아니라고 하고 싶다.
주님을 향하여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베드로의 그 고백 위에 주님은 자신의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셨다. 그리고 그 교회가 하늘을 매고, 푸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태 16:19). 즉 천국의 상황을 가장 잘 소개하고, 천국으로 향하는 길을 안내하는 유일한 소개소가 바로 교회인 것이다. 교회(혹은 성도)가 잘못하면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자신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할 수 있다(마태 23:13). 또 에베소서 1장 마지막 장면은 교회를 향하여 엄숙한 사명을 주고 있다.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엡 1:22). 이 구절을 분석해 보면 맨 위에 머리되신 예수님이 계시고, 그 분의 몸 역할로 교회가 있으며, 그 교회의 발 아래 만물, 즉 세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교회이고, 교회를 다스리는 분은 주님이시다.
결코 세상의 정치가, 경제가, 학자들이 이 세상을 다스리지 못한다. 정치가들이 운영하는 세상에 왜 이렇게 죄가 만연한가? 학자들이 제시하는 사상이 진정한 소망과 가치관을 주는가? 왜 세상은 이토록 개인주의, 이기주의, 현세주의, 다원주의로 흘러 가는가? 경제가들이 섬기는 세상에 왜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가?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다.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교회라고. 이 말은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에게 교회의 위상을 높여 주는 것 같아서 신나게 들릴 지 모르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진지하고 엄숙하게 들어야 할 말이다. 세상이 잘못되면 누구의 책임인가? 하나님은 누구에게 책임을 물으실까? 바로 교회라고 생각하는 우리 개개인(개인이 성전이므로-고전 3:16), 성도들의 모임(마18:20), 개교회, 교단, 교파, 그리고 모든 교회를 지칭하는 보편교회 등이 공동적으로 책임을 추궁당하게 될 일이다.
교회는 교회를 위해서 존재해서는 안된다. 교회는 세상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디트리히 본 훼퍼
교회는 남을 위해서 존재할 때만 참 교회가 된다.
(The church is only the church when it is for others)
마태복음 16장 27절은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말한다 –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주님께서 다시 오실 날이 진정으로 우리가 인생의 성적표를 받는 날이다. 그 날에 인생에 대한 진정한 평가가 나는 날이다. 그 평가는 결코 세상적 기준으로 되지 않음이 분명하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라는 기준으로만 평가될 것이다. 교회 사이즈가 문제가 아니라, 학력, 재력, 지위 등의 높고 낮음이 문제가 아니라 그 어떤 상황에서건, 어떤 영역에서건 그가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했느냐 안 했느냐에 하나님은 평가의 기준을 삼으실 것이다.
그 때 받을 상급을 신약성경에서는 면류관으로 자주 표현하였다. 신약에 모두 몇 개의 면류관이 등장하는지 아는가? 그리고 그 면류관은 어떤 자들에게 주는 것인지 아는가? 예수님께서 쓰신 가시 면류관까지 포함하면 모두 6개의 면류관이 나온다. 생명의 면류관(약1:12), 썩지 아니할 면류관(고전9:25), 자랑의 면류관(살전2:19), 영광의 면류관(벧전5:2-4), 의의 면류관(딤후4:8), 그리고 가시 면류관(요19:2). 이 면류관들은 모두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한 자에게 주시는 것이다. 처음 두 개의 면류관은 “인내”와 “절제”로 “자신”의 영혼 속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한 자에게 주시는 것이고, 나머지 네 개는 “전도”와 “양육”으로 통해서 “다른 사람”의 영혼 속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한 자에게 주시는 것이다.
미국 전역에 목회자와 개교회 평신도 지도자들이 모여서 기도하는 모임이 있다. “Prayer Summit”이라고 한다. 내가 속한 Washtenaw County에도 이 Prayer Summit 모임이 있고, 한 달에 한 번씩 모여서 기도하며, 일 년에 한 번씩 3박 4일 동안 기도만 하는(?) 이상한 수련회를 한다. 이 때는 목회자들이 모여서 서로를 위해서 기도하고 지역사회를 위해서 기도한다. 올해 이 모임을 참석하면서 한 번 더 하나님 나라 건설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각 교회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 물론 서로 뜨겁게 기도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한 목회자가 이 Prayer Summit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coordinate한 한 목회자를 위해서 기도하자고 제안했다. 그 목사님은 자신의 교회 사역이 바쁜 와중에도 불구하고 지역사회의 연합(unity)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순수한 마음으로, 열성적으로 뛰신 분이시다. 정말로 열심히 헌신한 분이셨기에 누구나 다 그 분의 마음,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한 그 분의 열정을 알고 있었다. 참석한 대부분의 목사님들이 나와서 그 분의 머리에, 어깨에 손을 얹고 기도하였다. 가장 뜨겁고, 가장 열정적인 중보기도, 감사기도의 순간이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하나님 나라 건설은 누구에게나 감사한 일, 감격적인 일이다. 반면 내 나라 건설은 나와 나와 가까운 사람에게만 좋은 일이다. 교회가 그 본질적 사명인 하나님 나라 건설에 최선을 다할 때 세상은 그런 교회를 통해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교회가 하나님을 세상에 보이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개인이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 개인의 삶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 각자가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삶의 영역에 하나님의 통치권이 형성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삶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유학생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 진로에 관한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그 진로의 결정마저도 하나님의 통치권에 맡긴다면 그는 참다운 의미의 방주를 이룩한 것이다. 학사에서 석사, 석사에서 박사과정에로의 진급을 학문과 지위에 대한 욕심 때문에 계속하려고 한다면 그의 삶을 통해서는 결코 하나님 나라는 세워지지 않을 것이다. 내가 공부하는 것에 하나님 나라 건설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 상급학교로 진급하려고 하는 나의 동기 속에는 내 인생 나라 건설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건설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 그 확신은 평강과 기쁨 속에 오는 것이다. 그런 확신이 있다면 학비 때문에 진로결정에 고민할 수는 있어도 결코 포기해서는 안된다. 그런 확신이 있다면 성적 때문에 고민할 수는 있어도 결코 포기해서는 안된다. 하나님 나라 건설에는 어느 정도 고난에 대한 인내가 따른다. 왜냐하면 세상 나라 속에 세워야 하는 하나님 나라이므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는 믿음 가운데 세워져야 한다. 성도 간의 관계 속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는 이루어져야 한다. 내가 못하는 일을 다른 성도가 잘 할 때 그 성도와 함께 기뻐할 수 있다면 그 성도 간의 관계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룩된 것이다. 이웃 교회를 위하여 늘 관심을 갖고, 기도하고, 섬기려는 노력을 할 때 교회는 참다운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다.
교회의 하나님 나라 건설 목표는 단지 지역교회, 한인교회 등에만 국한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미국에는 4-5천여개의 한인교회가 있다고 한다. 수많은 이 한인교회에는 미국교회는 없는 커다란 영적 장점이 있다. 곧, 기도의 열정, 봉사의 열정, 그리고 교회를 섬기고 사랑하는 열정 등은 여느 미국교회가 따라오기 힘든 큰 장점이 된다. 물론 미국 교회가 갖고 있는 장점도 많다. 그들은 좀 더 오랜 역사 속에서 정립된 성숙함, 합리성, 경험 등을 갖고 있다. 문제는 한인교회들이 좀 더 거시적 관점에서의 하나님 나라 건설에 동참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인교회들은 보편교회의 관점에서 보면 아시안 교회를 대표할 수 있다. 현재 미국에서는 백인들이 중심이 되는 교회와 흑인들이 중심이 되는 교회 간에 그리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지 못하다. 전통과 문화가 서로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에 쉽게 융화되어 하나님 나라를 이룩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 속에 아시안 교회가 들어가면 달라진다. 왜냐하면 아시안 교인들은 백인들과도 관계를 가질 수 있고, 흑인들과도 동감의 면을 쉽게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가장 큰 문제는 경제문제도 아니고, 정치 문제도 아니다. 그 깊은 내면 속에는 날로 다양하게 되어가는 인종들을 어떻게 융화로 이끌어 갈 것인가하는 문제가 숨어있다. 진정한 의미의 “United States”는 같은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만이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의 후손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자신의 혈통 비밀을 최후의 만찬에 남겨두었다는데서 명명된 '다빈치의 암호'(코드). 그 허망한 암호는 책의 뼈대를 이루는 몇 가지 토대에 대한 허구와 왜곡과 상상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비평가들의 공통된 평가다.
성경에서 난해한 구절 가운데 하나로 여겨지는 것이 술에 취했던 노아가 자기 손자 가나안을 저주하는 사건이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취해 자기 방에 벌거벗고 누웠다.
아버지 천막에 우연히 혹은 용무가 있어 들렀던 둘째 아들(함)이 그 사실을 형제들에게 알렸다.
형제들은 아버지의 벌거벗음을 보지 않은 채로 덮어주었다.
술이 깬 후에 그 사실을 알게 된 노아는 손자(가나안)를 저주했던 것이다.
이 구절은 언뜻 보면 말이 되지 않는다.
아버지가 한 잘못 때문에 손자가 저주를 받는다?
가나안이 할아버지의 만취(滿醉)와 관련해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날벼락 맞은 가나안
이 구절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해석은 이 이야기를 창세기가 기록되었을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가나안 사람들에 대한 '우월성'을 설명하기 위해, 오래전에 있었던 한 가지 사건을 통하여 정당화하고자 언급하는 서술 기법의 하나 혹은 예언 내용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해석은 나름으로의 단점이 있다.
즉 성경에 따르면, 가나안(자손)을 종으로 삼으리라던 셈 족속은 이스라엘 사람들뿐만 아니라 심지어 이스라엘의 원수인 아람과 앗수르 사람들도 포함되며, 함 족속에는 가나안 사람들(시돈, 헷, 예부스, 아모르, 기즈가스, 히위, 아르크, 신, 아르바드, 스마르, 하마르 족속)뿐만 아니라 아프리카인도 포함되며, 야벳 족속에는 소아시아와 유럽인이 포함된다.
다시 말하자면 후대의 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기에는 너무 많은 족속이 연루된다는 것이다.
가나안의 후예들이 셈과 야벳의 후손들의 비천한 종이 된다는 생각 자체가 적절하지 못하다.
그런 면에서 이 부분이 후대 이스라엘인들의 편에서 가나안인들에 대한 자신들의 우월성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또한 야벳 족속의 후예들(즉 백인)이 아프리카 흑인들을 노예화한 것에 대한 정당성을 찾기도 했다는 점에서 대단히 잘못된 해석이다.
그러나 문맥상 노아의 저주는 가나안 자신이 함과 야벳에게 비천한 종노릇을 하게 하는 것으로 제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술 취한 노아와 저주받은 가나안에게 돌아오게 된다.
노아의 저주가 가나안에게만 적용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우리에게는 저주의 정당성에 대한 문제가 남아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본문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노아의 '누드 폭로'에 가나안이 연루되어 있을 것이라는 추측을 제기한다.
그것도 가장 큰 기여(?)를 하지 않았나 의심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째서 가나안만이 할아버지 노아에게 저주를 받았겠는가.
그러나 이와 같은 가나안에 대한 혐의는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성경이 말하지 않은 범죄까지 들추어내어 가나안에게 내려진 중징계를 정당화시킬 수는 없지 않은가.
하나님께 순종한 의인, 노아가…
결국 우리의 관심은 다시 술 취한 노아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
아버지의 벌거벗은 모습을 본 것이 큰 죄악이었던가?
아니면 벌거벗음을 형제들에게 알린 것이 큰 죄악이었던가?
구약의 다른 구절에서는 (상징적으로) 다른 사람을 술 취하게 하여 그의 벌거벗음을 엿보는 행위를 악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합 2:15).
또 다른 구절에서 계모와 성관계를 맺어 (상징적으로) 아버지의 벌거벗음을 드러내지 말도록 규정하고 있다(레 18장).
심지어 롯의 딸들은 그와 성관계를 맺는데 술을 사용하기도 했다.
이같은 구절에 근거하여 노아의 술 취함과 함이 아버지의 벌거벗음을 본 일 사이에 성적인 의미를 찾으려 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이것은 본문에 대한 연관을 찾아볼 수 없다는 난점이 있다.
마지막으로 아직도 풀리지 않는 노아 코드를 원점에서부터 살펴보고자 한다.
노아 이야기의 시작으로 돌아가 보자.
"노아는 의인이며 당시 사람들 중에서 흠 없는 자였으며 그는 하나님과 동행했다"(창 6:9).
노아는 두 가지 면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첫째는 당시 사람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의인이었으며, 하나님 명령에 따라 언약을 맺고 방주를 지었다.
그는 동물을 모아 방주에 올라감으로써 하나님 명령을 완수했다.
그리고 의인으로 묘사되는 노아 이야기가 마지막에 술에 취해 장막 안에서 벌거벗었다가 손자 가나안을 저주한 '어처구니없는 사건'으로 종결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나는 노아의 술 취함과 저주를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에 문제를 제기하고자 한다.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하여 그 뜻을 준행하고 준수한 의인이라고 불렸는데, 설마 노아가 술이 덜 깨서 손자를 저주했겠는가.
계속 이런 관점을 유지한다면 이 사건은 미제로 남을 수밖에 없다.
이처럼 노아 이야기 패턴은 구약에서 희귀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해결책을 찾고자 한다.
노아 이야기와 사사기 혹은 열왕기에서의 사사들이나 왕들에 대한 평가를 비교해보면 노아의 술 취함과 저주의 의미는 명확해진다.
하나님의 소명과 성령의 인도 속에서도 계속 의심하고 하나님과 흥정하고 하나님을 시험하고 개인적인 정욕에 사용했던 사사들이 한둘이었던가.
사울의 경우,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했으나 산당은 제거하지 않아 백성들이 계속 제사하게 했다는 표현은 무엇인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의롭다고 불렸던 히스기야와 요시아의 경우는 어떠한가?
노아만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다.
노아 코드에 음모론은 없다
이제 노아의 저주는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물로 심판하셨지만, 노아와 그의 아들을 축복하셨다(9:1).
그러나 말년에 술에 취해 벌거벗고 누워있었던 노아는 '술에서 깨어난 뒤, 작은 아들(함)이 자기에게 한 일을 알고서' 가나안을 저주했다.
하나님은 노아와 세 아들을 축복하셨지만, 노아는 함의 아들을 저주함으로써 자기의 벌거벗음을 보고 형제들에게 알렸던 함을 저주한 것은 아닌가?
이것이 노아의 저주 사건에 대한 가장 간단한 해결책이다.
만약 노아가 함의 아들을 통해 그의 아버지를 저주한 것은 자기 아들이 아버지(노아)의 벌거벗음을 드러나게 한데 대한 보복이었던가? 아니면 노아가 술이 덜 깨서 대상을 잘못 골랐던가?
물론 이것은 구원론적 의미는 아니다.
아버지의 벌거벗음을 가린 일은 의로운 일이지만, 죄 없는 손자를 저주한 행위는 의롭지 못한 행위다.
이와 같이 노아의 코드에 음모론은 없다.
다만 '의인' 노아의 잘못만이 드러날 뿐이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삶은 노아와 같은가, 아니면 셈과 야벳과 같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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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죄는 함이 지었는데 저주는 가나안이 받습니까?
이는 하나님의 성품과 모순되지 않습니까?
창세기 9:22-25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자기 아버지의 벌거벗은 것을 보고 밖에 있는 두 형제에게 고하매 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올려놓고 뒷걸음쳐 들어가 자기 아버지의 벌거벗은 것을 덮더니 그들의 얼굴이 뒤를 향하였으므로 그들이 자기 아버지의 벌거벗은 것을 보지 아니하였더라. 노아가 포도주에서 깨어나 자기의 작은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을 것이요, 그 형제들에게 종들의 종이 될 것이니라, 하고.
여기서 성도들이 자주 제기하는 의문은 두 가지입니다.
어떻게 함이 행한 사소한 실수를 가지고 노아가 무서운 저주를 할 수가 있는가?
왜 함이 아닌 함의 자식 가나안이 저주를 받았는가?
우리는 여기서 성경을 매우 주의깊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단순히 아버지 노아가 술에 취해 옷을 다 벗은채 자는 것을 보고 다른 형제들에게 일러 주었을 뿐인데 노아가 일어나서 불같이 화를내며 저주를 했다면 노아의 인격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준행한 노아가 자신의 벌거벗은 몸이 들킨 사실로 인해 그렇게 화를 낸 것은 아닙니다.
22절에서
함은 “자기 아버지의 벌거벗음을 보고”라고 말했지만 24에서 노아는 깨고 나서 그 사실을 안 것이 아닙니다.
함이 눈으로만
아버지를 보고 나갔다면 술에 취한 채 자고 있는 노아가 그 사실을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24절을 보면 노아는 술에서 깨고 나서 “자기의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라고 말합니다.
눈으로 보고 간 일은 자기에게(unto him)에게 아무 것도 안 한 것이지 한 것이 아닙니다.
노아가 말하는 것은 자기 몸에 함이 무슨 짓을 하고 간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노아의 몸에 성추행 또는 동성애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부분에 대해서 자세히 묘사하지 않더라도 성경을 읽으면서 구절과 구절을 비교하면 함이 무슨 짓을
했는지 저절로 알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레위기 18:6-7
너희
가운데 아무도 가까운 친족에게 다가가서 그들의 벌거벗음을 드러내지 말라. 나는 [주]니라. 너는 네 아버지의 벌거벗음이나 네
어머니의 벌거벗음을 드러내지 말라. 그녀는 네 어머니인즉 너는 네 어머니의 벌거벗음을 드러내지 말지니라.
이는 근친 상간, 동성연애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노아의 증언과 레위기의 말씀을 통해 창세기 7:22에서 함이 아버지 노아의 벌거벗음을 보았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저절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대답은 창세기 3장의 선악과 사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가 처음으로 행한 일은 자신들의 알몸을 가리는 일이었습니다.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게 된 후, 자신들이 벗고 있는 점이나, 서로의 알몸을 보는 일은 악이라고 판단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들이 벗었음을 깨달았다는 점을 통해 선악과를 먹었느냐고 물어보셨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한 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벗은
몸을 드러내는 일이나, 벗은 몸을 보는 일은 악, 또는 나쁜 일이라는 점입니다.
그들은 악을 행하지 않기 위해서 뒤돌아 선 채로 아버지에게 옷을 덮어주게 됩니다.
그리고 얼굴을 돌이켜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이들은 악의 반대로 행동했기 때문에 선한 행동을 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이미 아버지의 벗은 몸, 하체를 본 함은 악을 행하였고, 그것은 함의 죄가 되었습니다.
노아의 저주
술에서
깬 노아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알게 됩니다.
함이 자신의 하체를 본 일과 나머지 두 아들이 자신의 하체를 보지 않고 옷을
덮어준 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노아는 엄청나게 화를 냅니다.
너무 화가 나서 자신의 아들을 저주하기까지 합니다.
노아가
얼마나 화가 나 있었는지, 둘째 아들을 향해 이런 선포를 합니다.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그냥 ‘종이 되라’도
아니고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반대로 셈과 야벳에게는 축복을 합니다.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사실
셈과 야벳에 대한 축복은 축복이라기보다 함에 대한 저주의 연장선이라고 보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또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저주 받는 사람의 이름이 ‘함’이 아니라 함의 아들인 ‘가나안’이라는 점입니다.
그것도 함의 장자도 아닌 넷째 아들인
가나안입니다.
게다가 아들을 향한 이런 저주 역시도 우리의 정서에서는 이해되기 어려운 측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성경이
가진 분명한 의도가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어나간다고 했을 때, 아주 초반부인 창세기 9장에서 이 저주의 선포를 읽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한 가지의 생각을
품게 됩니다.
‘가나안은 저주 받았다.’ 그 인식을 가지고 이후의 이야기들을 읽어나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가지고 있는
의도입니다.
단순한 개인으로의 함과 가나안이 아니라 우리가 뒤이어 읽어나가면서 만나게 되는 민족으로의 가나안을 의미합니다.
즉 노아의 저주는 함과 가나안 개인에 대한 저주가 아니라 함의 자손이 이루게 될 민족, 특히 가나안의 민족들을 향한 저주였습니다. 그 저주의 연장선에서 가나안은 셈과 야벳을 섬겨야 한다는, 그들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확정을 노아가 만들어주고 있는 셈입니다.
이들의 자손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런
성경의 의도가 있었기에 이 사건 뒤, 창세기 10장에서는 세 아들의 족보가 등장합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저주받은 민족이 어느
민족인지를 머릿속에 심어 두고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됩니다.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은 야벳의 족보이고 그 다음은 ‘가장 천한
종’이 되어야 할 함의 족보이고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의 조상인 셈의 족보가 등장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재미있는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10장에서 ‘가장 천한 종’ 함의 족보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함에게는 네
명의 아들이 있는데, 개역개정 성경에는 ‘구스’, ‘미스라임’, ‘붓’, ‘가나안’으로 되어 있습니다.
새번역과 공동번역개정판은 이
중 두 아들의 이름을 우리에게 친숙한 이름으로 번역해줍니다.
‘미스라임’은 ‘이집트’이고 ‘붓’은 ‘리비아’입니다.
‘붓’의
경우에는 그 자손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지만, 나머지 세 형제의 자손은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구스’의 자손은 이름보다는 그들이
정착한 지역을 보시면 어떤 민족인지 바로 알게 되실 것입니다.
그들의 정착지는 바벨과 앗수르입니다.
‘미스라임’은 이집트
자체이기 때문에 더 설명이 필요 없겠지만, 그 자손 중 ‘가슬루힘’에게서 블레셋이 나왔다고 말합니다.
‘가나안’의 자손들은 우리가
민수기, 신명기, 여호수아를 통해 끊임없이 보게 될 이름들이기에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될 듯합니다.
이
족보가 재미있는 이유는, 함의 자손들은 훗날 이스라엘 주변에 거대 제국을 만들어냈기 때문입니다.
‘가장 천한 종’이 되었어야 할
함의 자손들은 오히려 거대 제국을 이루어냅니다.
반면에 축복을 받았던 셈은 우리가 잘 아는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었고, 야벳의
자손들은 멀리 멀리 서아시아와 유럽 지역까지 가서야 정착하게 됩니다.
노아의
축복과 저주를 실제의 역사와 연결시켜서 생각해본다면 축복을 받은 자손들은 그저 그런 민족을 이루었고, 저주를 받은 함의 자손들은
역사 속에서 이름을 날린 제국들, 거대 제국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축복과 저주가 뒤바뀐 듯 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심지어 훗날
이스라엘은 이집트 포로기를 거쳤고, 앗수르와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당합니다.
혹시나
이 내용에 따른 지도를 보시고 싶어서 인터넷이나 성서지도를 찾아보신다면, 그 지도의 내용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확인하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사용되는 성서지도는 대게 서양에서 나온 지도들을 기반으로 번역만 해놓았기 때문에, 서양인들이
전통적으로 해왔던 이야기가 너무 심하게 반영되어 있습니다.
셈은
근동의 조상, 야벳은 서아시아의 조상, 함은 아프리카의 조상으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아프리카 흑인을 노예로 부렸던
정당성을 성경에서 찾았고, 지도에도 그 의도가 여실하게 반영된 채,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성서지도를 찾아보시려면 지도의
지명과 성경에 나타난 이름들을 직접 대조해보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무엇이 축복인가?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그렇다면 노아의 축복과 저주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바는 무엇일까요?
성경은 우리가 생각하는 역사적 팩트를
기록한 책이 아닙니다.
자신들의 역사를 회상하면서 그 역사를 통하여 현재 그들의 신앙고백을 담고 있는 책이 성경입니다.
창세기가 어느 시대에 기록되었는가를 여기에서 논할 이유는 없겠지만, 학자들은 창세기가 바벨론 포로기에 완성되었다고 말합니다. 보수 교회가 이야기하듯이 창세기를 모세가 기록했다고 해도, 사건이 발생한 순간의 기록이 아닌, 후대의 기록임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어느
시대에 기록되었는가의 문제는 분명 축복과 저주의 의미를 변화시킬 수도 있겠지만, 오늘의 본문에서 나타난 축복과 저주는 어느
시대에 기록되었건 분명히 동일한 한 가지의 고백을 드러냅니다.
아무리 거대한 제국을 이룬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복을 받은
존재가 아니라는 점이며, 자신들은 비록 초라하고 처량한 신세일지언정 하나님의 복을 받은 존재라는 점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못사는 사람들의 변명처럼 보일 수도 있고, 오히려 자신을 더 초라하게 만드는 궁색한 고백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의 고백이 초라하지 않은 이유는, 그러한 강대국들을 바라보면서 자신들은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거대 제국을 이룬 나라들처럼 살아간다면, 자신들도 제국을 이룰 수 있을지 모릅니다. 선과 악 중에서 악을 선택하고 살아간다면, 자신들도 잘 살게 될지 모릅니다.
하지만 창세기의 고백은 결코 그 길로 나아가지 않겠다는 당시 사람들의 고백이 처절하게 담겨져 있습니다. 악함 위에 제국을 세우느니, 때로는 힘들지 몰라도, 선함 속에서 살아가겠다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고, 말씀을 듣는 가운데, 돈을 바라보며 사는 신앙은 맘모니즘이라고 배워왔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맘몬을 숭배하는 풍조라고 익히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하나님께 물질의 풍요를 간구합니다. 부를 쌓아서 잘 먹고 잘 살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기준으로 놓고 보았을 때, 목회자는 부를 바라는 성도님을 향해서 노아가 함에게 했던 데로 저주를 해야 옳습니다. 저주를 받았던 함의 자손들이 셈이나 야벳의 자손들보다 더 잘나가는 사람이 되었으니까, 누군가 부를 바란다면 당연히 저주를 해야만 할 것입니다. 어쩌면 이런 이야기를 들으시고 정말로 저주를 바라는 성도님들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전하는 저주의 결과는 하나님의 부재입니다. 저주 받은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습니다. 그곳에 세상적인 부와 권력이 있을지는 몰라도 그곳에 하나님은 계시지 않습니다.
비록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들어 쓰신다고 선포하였지만, 그것은 이스라엘의 심판을 위해서 바벨론을 도구로 사용하셨던 것 뿐이지, 하나님께서 바벨론과 함께 하셨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힘들고 어렵지만, 선하게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들 속에 하나님은 계십니다. 요나에서 볼 수 있듯이, 앗수르의 니느웨는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였고, 그랬기에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으로 얻게 되는 것은 부와 권력이 아닌 평안, 샬롬입니다.
축복인가 저주인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부와 권력이 모든 것인 세상입니다.
마음의 평안보다 세상에서의 즐거움, 부와 권력이 더 필요하시다면 그
길로 나아가셔도 좋습니다.
다만 그 길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고 싶으시다면, 악을
멀리하고 선한 길에 서시기 바랍니다.
함과 같이 부지중에라도 악한 일을 행하지 마시고, 삶의 어떤 순간이라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복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을 얻게 되실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