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나팔


두 나팔, 쇼파르(שןפך)와 요벨(ג'ובל)

레위기 25:8-12

​8. 너는 일곱 안식년을 계수할지니 이는 칠 년이 일곱 번인즉 안식년 일곱 번 동안 곧 사십구 년이라
9. 일곱째 달 열흘날은 속죄일이니 너는 뿔나팔 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뿔나팔을 크게 불지며
10. 너희는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가며 각각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
11. 그 오십 년째 해는 너희의 희년이니 너희는 파종하지 말며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며 가꾸지 아니한 포도를 거두지 말라
12. 이는 희년이니 너희에게 거룩함이니라 너희는 밭의 소출을 먹으리라

* 요벨(3104) יֹבֵל 

1. 뿔 나팔 소리,  2. 은 나팔의 신호, 3. 악기
발음 [ yôwbêl ]
어원 / 혼성. 2936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임
관련 성경 / 나팔(출19:13), 희년(레25:10,54, 27:18), 양각나팔(수6:4,5,6).
구약 성경 / 27회 사용

* 쇼파르(7782)  שׁוֹפָר

1. 나팔
발음 [ shôwphâr ]
어원 /복수 שׁוֹפָיוֹת 823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나팔(출19:16, 삿3:27, 슥9:14), 뿔나팔(레25:9, 왕상1:34,39).
구약 성경 / 72회 사용

9일곱째 달 열흘날은 속죄일이니 너는 뿔나팔 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뿔나팔을 크게 불지며 10너희는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가며 각각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

희년에 관한 말씀은 상당히 중요한 말씀이면서 동시에 해석하기 어려운 부분이기도 합니다.
많은 주석 학자들이 헷갈려 하는 것이 49년째의 안식년과 50년째의 안식년이 두 번 이어지기에 지키기 어려울 뿐 아니라 안식년이 중복되는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희년이 6개월 앞당겨 시작되었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억지로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닙니다(벧후 1:20-21,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10절의 말씀처럼 희년은 오십 년이 되는 해에 지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안식년과 이어지는 희년을 지키게 하기 위해서 마지막 여섯째 해에는 삼 년 동안 먹을 양식을 주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21내가 명령하여 여섯째 해에 내 복을 너희에게 주어 그 소출이 삼 년 동안 쓰기에 족하게 하리라).

매 안식년을 알리는 뿔 나팔 소리가 속죄일(7월 10일)에 전국에 울려 퍼졌습니다.
마찬가지로 희년에도 같은 속죄일에 뿔 나팔을 불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뿔 나팔인데 다른 단어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안식년의 뿔 나팔은 '쇼파르(שןפך)'로써 수양의 뿔로 만든 나팔입니다.
그런데 희년에도 같은 수양의 뿔로 만든 나팔을 불었는데 '요벨(ג'ובל)'이라는 다른 이름을 사용하였습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보통 속죄일에는 한 해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가 선포되는 때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초막절(장막절)로 이어지는 축제로 광야에서 하나님의 돌보심을 돌이키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하나님께서 한 해 주신 풍성한 수확에 감사를 드리는 절기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희년의 속죄일은 대속죄일로 나팔의 의미가 달라집니다. 그것은 곧 마지막 때의 심판과 영혼의 추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요벨'은 여호수아가 여리고성을 무너뜨리는 심판의 장면에서 주로 사용되었습니다(수 6:4,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나아갈 것이요 일곱째 날에는 그 성을 일곱 번 돌며 그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그러므로 마지막 때의 나팔 소리는 믿는 자들에게는 자유가 공포되는 것이지만,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여리고성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심판이 선포되는 것입니다. 불신의 견고한 진이 무너지는 때입니다.

또한 마지막 심판이 있은 후에는 구원받은 자(십사만 사천)들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으로서 영혼의 추수가 끝나고 하늘 곳간에 모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희년은 곧 마지막 심판의 때에 이뤄질 일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쇼파르' 나팔은 이미 2천 년 전에 울려 퍼졌습니다. 따라서 초림 예수님은 우리에게 '쇼파르'의 나팔로써 자유를 선포하신 반면에, 재림 예수님은 '요벨'의 나팔로써 심판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나팔소리가 울려 퍼질 때 두려움에 떠는 자가 있고, 기쁨으로 신랑을 맞이하는 자가 있습니다. 이 땅에서 진정한 안식일과 안식년, 희년을 삶을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희년의 삶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희년의 규례는 안식년의 규례를 강화한 것입니다.
그래서 종살이하던 자들은 본래의 기업을 되찾고(레위기 25:10, 39-43, 54),
땅과 집은 본래 주인에게 돌아갔습니다(레위기 25:23-34).
또한 모든 빚을 탕감을 받았습니다(레 25:35-38).

​이와같이 50년마다 돌아오는 희년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과 자연으로 하여금 본래의 위치와 역할로 회복되도록 하기 위하여 주어졌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희년은 영적인 의미가 있는 해이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4:30-31
30.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31. 그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마지막 때가 다가올수록 거짓 그리스도와 선지자들이 우후죽순으로 늘어날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하늘에 올려지신대로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신다고 하셨는데, 자가용을 타고 와서는 그리스도라고 주장하는 자들에 현혹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땅에서 완전한 희년의 삶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여전히 공중 권세 잡은 악한 영들이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비록 우리의 육신은 부활하기 전까지 속박을 당하지만, 우리의 영혼은 참 자유자가 되는 것입니다.
죄의 종살이에서 벗어나 본래의 기업, 즉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의 기업을 되찾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며 찬양하는 삶 말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기 전에는 썩어질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거듭난 자는 육체를 위해 심는 자가 아니요 오직 영에 속한 자로서 성령을 위해 심는 자입니다(갈 6: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그러한 자들은 마지막 때에 기쁨으로 단을 거두는 자들입니다(시 126:6,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모든 것을 수확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영혼의 수확은 마지막 때에 이뤄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 소망을 가진 자, 희년의 복을 받은 자들의 모습니다.

​교회 안에 팽배해진 사회주의 사상에 빠진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너무도 안타까움을 가지게 됩니다.
저들은 자신들이 의롭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들이 하는 말은 성경에서 크게 벗어나거나 틀린 말이 아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도덕적 수준의 의를 가지고 교회를 판단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말합니다.
하지만 저들은 하나님의 '공평'과 '평등'조차도 구별하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그렇기에 저들의 눈에는 가진 그리스도인은 적폐가 되는 것입니다.
자유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악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옳음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무너지는 한이 있더라도 '평등'을 실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돈이 악한 것이 아니라 돈을 사랑하는 것이 악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딤전 6: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그러므로 '평등'을 주장하는 자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까지 부정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저들은 진작 청렴을 말하면서도 자신들은 누구보다도 많은 것을 가지고 누립니다.
참으로 위선자들입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공평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저들의 논리라면 이 땅에 모든 자들은 죄를 짓던 안 짓던 마땅히 구원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저들이 만든 하나님입니다.

​바울은 사회주의자가 아니라 복음주의자였습니다.
그는 부자의 것을 빼앗아 가난한 자에게 주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각자 주어진 달란트대로 나눔을 실천하는 것이 사랑의 실천이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 8:13-15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균등하게 하려 함이니 이제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 기록된 것 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라는 주님의 말씀을 악용하여 동성애를 받아들이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 8:1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는 동성애를 허용하는 곳이 아니라 회개한 동성애자를 받아들이는 곳입니다.
성경은 술 마시지 말라고 하지 않지만 술 마시는 자와는 사귀지도 말라고 합니다(고전 5:11,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모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속여 빼앗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교회 밖에서는 믿지 않는 자들 중에 바람피우는 자도 있고 술 취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들과는 어쩔 수 없이 사업이나 업무 관계상 만날 수 있습니다.
또한 이들은 구원의 대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죄를 짓는 세상 사람들과 어울리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그러나 교회 안에서 죄를 짓는 자들과는 교제조차 하지 말라고 강한 어조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지 않고 여전히 죄 가운데 있는 자를 무조건 용납하라는 것은 주님의 몸 된 공동체를 심히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63:2-5
어찌하여 네 의복이 붉으며 네 옷이 포도즙틀을 밟는 자 같으냐 만민 가운데 나와 함께 한 자가 없이 내가 홀로 포도즙틀을 밟았는데 내가 노함으로 말미암아 무리를 밟았고 분함으로 말미암아 짓밟았으므로 그들의 선혈이 내 옷에 튀어 내 의복을 다 더럽혔음이니 이는 내 원수 갚는 날이 내 마음에 있고 내가 구속할 해가 왔으나 내가 본즉 도와 주는 자도 없고 붙들어 주는 자도 없으므로 이상하게 여겨 내 팔이 나를 구원하며 내 분이 나를 붙들었음이라

​주님이 공중 재림하시면 이 땅에서의 모든 삶은 다 마감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동안 무엇을 소유했던지 그 모든 것을 다 놓아두고 주님을 만나러 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이 영원할 것처럼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세상이 전부인 양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적 그리스도의 편에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포도즙 틀을 밟을 때에 저들은 비명을 지르게 될 것입니다.

​반면에 성경은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고 하늘로서 오시는 분을 기다린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기업이 지금 현재 이 땅에 있지 아니하고 하늘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새 하늘 새 땅이 열리게 될 때 우리는 새로운 땅을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한 기업으로 물려받을 것이며 그것은 결코 누구에도 빼앗기지 않는 영원한 기업이 될 것입니다.

10너희는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

이스라엘 백성들이 더 이상 희년을 지키는 것을 포기했지만, 주님께서는 어둠의 땅에 오셔서 희년을 선포하셨습니다.
즉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선포하신 것입니다(눅 4:18, 주의 성령이 네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네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자에게 다시 보게함을 전파하며 눌린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그러므로 이 시대의 참 자유자는 우리 몸의 완전한 구속이 이뤄지는 은혜의 해를 고대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을 고대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연약한 육체 가운데 있기에, 자기 육체를 쳐서 주님께 복종시키는 삶이 희년을 지키는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