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다 / 호라오(ὁράω ), 옵타노마이(ὀπτάνομαι), 에이도(εἶδω), 데아오마이(θεάομαι), 블레포’(βλέπω)







요한복음 20:24-29

24. 열 두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예수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하시고
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8.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ὁράω) 고로 믿는구나. 보지(εἴδω)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오늘날 도마의 이름 앞에는 자주 "의심많은"이라는 형용사가 붙어서 "의심많은 도마"라는 것이 아주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도마를 믿음이 없고 의심 많은 사람의 상징으로 설명하는 오류를 범한다. 왜냐하면 그 동안 설교자들로부터 그렇게 들어왔기 때문이다. 

한글 성경을 보면, 도마의 태도는 "보지(εἴδω) 않고는 믿지 않겠다"(25절) 였고, 예수께서도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라고 하신 뒤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다"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특히 NIV성경은 "Stop doubting and believe"라며 "의심을 멈추고 믿어라"라고 번역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마는 믿음이 없는 사람이 하는 것 같은 그의 말과는 반대로 주님을 보자(ὁράω 호라오)마자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My LORD and my God)"이라는 신앙고백을 하며 그의 믿음을 보였는데, 이는 그가 육의 눈으로 못자국을 보고(εἴδω 에이도) 믿음의 고백을 한 것이 아니다. 

요한복음 20:25절에서 다른 제자들이 "우리가 주를 보았다"라고 했을 때, "보았다"라는 헬라어 "호라오(ὁράω)"는 마음으로 보고 깨닫고, 체험을 통해 보는 것 즉 육안으로 보는 것만이 아니라 누군가로부터 이야기를 들을 때에 그것을 보지 않아도 본 것처럼 그 내용을 알게 되는 것을 말하며 더 나아가 영적으로 보고 아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제자들이 주님을 보았다고 말한 것은 눈으로 본 것만이 아니라, 정말로 주님인 것을 깨달아 알았다는 것을 말한 것이고, 도마가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고 한 말의 "보다"라는 헬라어 "에이도(εἴδω)"는 눈으로 보아서 아는 것을 말한다.
"에이도"에서 ‘우상’이라는 ‘에이돌론’(εἴδωλον), 영어의 아이돌(idol)이 유래된 것만 보아도 무슨 뜻인지 알 수 있다

육의 눈과 영의 눈으로 보는 차이

에이도와 호라오는 둘다 "보다"라는 뜻을 갖고있는데, 에이도는 호라오 안에 속해있는 단어이다.
예수께서 한 문장 안에서 "보다"라는 말을 두 가지로 사용하신 것과 이 짧은 문장 속에서 마태가 굳이 다른 단어를 사용하여 기록한 이유를 알아야 한다. 

헬라어 중에 '보다'라는 단어들을 보면, 단순히 "보다"라는 뜻을 포함하면서 어떤 것들은 더 넓은 뜻을 내포하고 있어서 다음의 몇 가지 단계로 분류할 수 있다. 

(1) 눈으로 보는 것(옵타노마니 ὀπτάνομαι,옵타노 ὀπτάνω 마 5:8, 17:3, 눅 17:22) 

(2)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하는 것(에이도 εἶδω 마 2:2) 

(3) 자세히 보는 것, 관찰하는 것(떼아오마이 θεάομαι, 떼오레오 θεωρέω 마 6:1, 11:7, 눅 24:37) 

(4) 보는 능력, 알아차리는 것, 주의하는 것(삼가...) (블레포 βλέπω 마 12:22, 막 13:33, 롬 7:23) 

(5) 여러 상황을 통해 실체를 아는 것, 특히 신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을 보는 것, 예언적으로 보는 것, 영적으로 깨닫는 것에 쓰임 (호라오 ὁράω 눅 1:22, 요 1:18)

그러면, 예수께서 도마에게 하신 말씀을 위의 뜻으로 다시 보자.

"너는 나를 본(ὁράω)(5)고로 믿는구나. 보지(εἴδω)(2)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특히 예수께서 "복되도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마태복음 5장의 8복과 똑같은 패턴이며 성경에서 말씀하는 '복'은 '영생의 복'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Blessed are the poor in spirit:)"(마 5:3) 

"...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시 133:3)

따라서 이 말씀을 의역하면 다음과 같다. 

"너는 나를 (5)믿음의 눈으로 보았기에(영적으로 보고 알았기에) 믿었구나. (2) (영생을 소유한) 복된 자들은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해 버리지 않고 (믿음의 눈으로 보고) 믿는 자들이다."

성경에서 "Blessed are ..."라는 패턴으로 쓰인 말씀들은 영생을 소유한 거듭난 자들에게 사용되는 말이다. 예수께서 도마에게 "믿음(faith)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believe) 자가 되라"(27절)라고 말씀하셨는데, 영어번역은 다른 단어를 사용했으나 헬라어 원어는 둘 다 피스토스(πιστός)로 쓰였다. 이는 성령의 열매인 '충성'이며(갈 5:22) 거듭나지 않은 자가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없으므로 중생한 크리스천의 믿음을 말한다. 따라서 "믿음 없는 자(아피스토스 ἄπιστος)는 거듭나지 않은 자(without Christian faith)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도마에게 믿음이 없다고 책망하신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있는 네가 왜 그렇게 영생이 없는 세상 사람처럼 말하느냐고 책망하신 것이다. 즉 믿음 없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직접 보고 경험해 보아야 믿겠다는 식으로 아무렇게나 말하지 말고 거듭난 그리스도인으로서 믿음을 보이라고 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하여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라고 말씀하셨다(마 12:39, 16:4). 즉 우리가 모르거나 믿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정말 주님이신지, 정말 주님이 살아계신지를 시험하기 위하여 표적을 구하고 그것을 경험해야 믿겠다고 하는 것을 "악하고 음란하다"라고 말씀한다. 즉 주님을 시험하기 위하여 표적을 구하는 것은 믿음이 없을 뿐만 아니라 우상숭배의 죄를 범하는 것이다. 

그래서 과거에 표적을 구하던 바리새인들을 책망했던 것을 알고있던 도마는 주님의 말씀을 듣자마자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라며 믿음의 고백을 했던 것이다. 그는 주님을 본 순간(호라오) 즉 영적으로 그분이 부활하신 주님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자기를 부인하며 종의 자리로 내려가 "나의 주"라고 고백할 수 있었다.

믿음이 없고 의심많은 제자들

성경에는 도마의 이름을 거론하며 직접적으로 의심이 많다거나 믿음이 없다고 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모든 제자들 또는 제자들의 대표인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1) 5병2어 사건 이후에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가다가 예수께서 물 위로 걸어오시는 것을 보며 유령인 줄 알았는데 주께서 안심시켜 주신다. 그때 베드로가 예수님을 믿고 물 위를 걸어가다가 바람을 보며 무서워 빠지는 것을 보며 예수께서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라고 하셨다(마 14:31).

(2)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이 일어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자 "어찌하여 무서워 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하셨다(마 8:26).

(3)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두 제자가 엠마오로 가고 있을 때에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함을 보며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라고 책망하셨다(눅 24:25).

(4)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 전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셨을 때에도 제자들은 믿지 못했고 예수께서는 그때에 그들에게 왜 의심하느냐고 하셨다.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저희가 너무 기쁘므로 오히려 믿지 못하고"(눅 24:38-41)

(5)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지시하신 산에 와서 예수님을 뵈었으나 의심하는 자가 있었다. "열 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마 28:16-17).

칭찬받은 도마

왜 주께서 이렇게 도마를 칭찬해 주셨을까? 그것은 주님을 뵙자마자 도마는 정말로 자기 앞에 계신 분이 부활하신 주님이라는 것을 믿음의 눈으로 보고 알았기에 못자국과 옆구리를 확인할 필요도 없이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했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당신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지만, 도마는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으나 도마는 "나의 주"이며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했다.

게다가 예수께서 나사로를 살리러 가자고 하실 때에 모든 제자들이 예수님을 말렸으나, 스승의 마음은 반드시 그곳에 가려고 한다는 것을 파악한 도마는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요 11:16)라고 제자들을 설득했다.

베드로는 항상 "다른 이들은 다 주를 버릴찌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마 26:33)라며 항상 자기 자신과 다른 이들을 비교하며 "내가"라고 했던 반면, 주님에 대한 고백에 있어서는 객관적으로 말했다. 그러나 도마는 항상 "우리"라고 말하므로 제자 공동체에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예수님 앞에서는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며 개인적인 신앙 고백을 했던 것이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을 때에 "네가 복이 있다"(Blessed are you)라고 말씀하신 주님은, 도마가 주님을 알아보고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을 하자 베드로에게 하셨던 것과 똑같이, 육안으로만 판단하며 믿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보고 믿는 그들에게 복이 있다(blessed are they)고 말씀하신 것이다.

믿음은 현실로 보이지는 않지만 보이는 것처럼 사는 것을 말하며, 현실과 반대되는 것이 진리라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것을 말한다. 이 사건은, 눈으로 보고 확인해야 믿겠다고 하는 것은 거듭난 자가 아니며, 진정으로 거듭난 자는 도마와 다른 제자들처럼 예수께서 찾아와서 비록 책망을 하시더라도 결국 믿게 해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그분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를 지명하여 부르시고, 부르신 그 사람을 찾아오시고 찾아오신 그 사람에게 사명을 주신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즉 우리는 그분이 없이는 유명무실한 존재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따라서 아직도 내가 주를 위해 무엇을 하겠다거나, 내가 주님을 찾아간다거나, 내가 주님께 영광을 돌리겠다고 하는 이들은 아직까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이다. 많은 이들이 올림픽 등 경기에 나가서 메달을 따서 혹은 멋진 음악을 연주하여 또는 선한 일을 하여 주께 영광을 돌리겠다고 한다. 

그러나 영광은 주께서 홀로 받으시는 것이지 우리의 어떤 행위로도 그분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분께서 우리 가운데 임재하시는 것이 영광이지, 우리가 영광을 돌릴 수 없다. 

그러므로 주님 앞에서 열심히 무언가를 하여 주님의 이름을 높이겠다는 교만을 다 내려놓고 도마처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며 자기를 부인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한다. 자기를 부인한 자만이 영생을 소유한 "복있는 자"가 되어 주님의 칭찬을 받기 때문이다.

[적용] 

당신은 지금 어떤 눈으로 무얼 보고 있는가?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눈으로 보고 판단해버리고 결론을 짓는 믿음없는 육안으로 세상과 주님을 보고 판단하고 있지는 않은가? 아니면, 성령안에서 하늘의 지혜와 믿음의 눈을 갖고 복이 있는 자로서 세상과 주님을 보고 알고 있는가? 베드로와 도마처럼 "네가 복이 있다"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보았는가? 나는 정말로 영생을 소유한 자인가? 나는 아직도 표적을 구하며 주님을 시험하는 우상숭배자인가? 아니면, 도마처럼 확인하지 않아도 영의 눈이 떠져서 주님을 알고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며 살아가는가?

[기도 제목] 

1) 육의 사람이 아닌 영의 사람으로 살도록 성령충만케 하옵소서

2) 모든 언행에 믿음없는 자처럼 살지 말고 믿는 자로 살도록 믿음을 주옵소서

3) 주님의 평강이 세상의 모든 염려를 떨쳐버리게 하옵소서

4) 객관적인 신앙고백을 하며 사는 것을 뛰어넘어 나의 신앙 고백을 하며 살아가게 인도하옵소서.

5) 나의 어떠한 행위로도 주께 영광을 돌릴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깨닫고 항상 나 자신을 부인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만 따라가게 하옵소서.

6) 주님을 시험하기 위하여 표적을 구하며 영적 간음을 행치 말고, 믿음이 없어서 보고 느끼고 경험해 보아야 믿겠다고 하지도 말고, 오직 그리스도의 장성한 사람으로 살게 하옵소서.

7)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증인의 삶을 살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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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는 “보다”라는 단어를 단순하게 번역하였지만 원문 속으로 들어가면 '보다'라는 의미를 좀 더 상세하게 사용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1. 호라오(ὁράω )

'보다' 라는 뜻을 갖은 동사로서 눈으로 보다, 마음으로 보다, 인지하다, 알다, 경험하다. 깨닫다 라는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 요 1:18 본래 하나님을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 요 1:34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

. 요 3:11 진실로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것을 증언 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2. 옵타노마이(ὀπτάνομαι)

응시하다, 보여지다'( 눈으로, 향한 것처럼, 관찰하다. 나타내다라는 의미로 관심을 가지고 보다라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 요 1:50-5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3. 에이도(εἶδω)

수동적이거나 우연한 바라봄으로 ‘겉을 보고 깨닫다, 지식을 갖다, 확신하다, 발견하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에이도는 ‘우상’이라는 ‘에이돌로’(εἴδωλο)에서 유래되었으며, 우상이란 눈에 보이는 형태, 외모를 보고 확신해 버리면 그것이 우상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요 1: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 요 1:47-48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4. 데아오마이(θεάομαι)

가까이서 보다, 지각하다, 주목하다, 보고 배우다, 방문하다’는 뜻을 가지고있습니다.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 1:32 요한이 또 증언하여 이르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5. 블레포’(βλέπω)

자발적인 관찰이라는 의미로 ‘경험으로 알다, 마음의 눈으로 보다, 이해하다, 생각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요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 5:19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원어의 다양한 의미에 대한 자각에 관하여 여러가지 의견이 있으나 이러한 다야한 의미의 단어를 상황에 따라 다르게 기록하고 있는데는 분명히 저자의 전달하고자 하는 깊은 의도가 분명이 담겨있다고 생각합니다.

보다라는 단어의 의미

첫째로 응시하는(ὀπτάνομαι) 단계에서

둘째로 보이는 그대로 보고 판단해 버리는(εἶδω) 단계

셋째로 자세히 보아(θεάομαι) 경험과 마음으로 아는(βλέπω) 단계로 그

넷째로 데아오마이(θεάομαι)는 가까이서 보다, 지각하다, 주목하다, 단계에서

다섯째로 깨달아 알게 되는(ὁράω ) 인지함으로 보게 되는 단계로 그 깊음이 다름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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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심하다, 살펴보다.

조심하다, 삼가다, 돌아보다, 향하였더라
1,조심하다 :  ble,pete         2,힘쓰는 자임이라 : evrga,zetai
고전16:10 디모데가 이르거든 너희는 [조심하여] 저로 두려움이 없이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 이는 저도 나와 같이 주의 일을 힘쓰는 자임이니라
(고전16:10)  VEa.n de. e;lqh| Timo,qeoj( ble,pete( i[na avfo,bwj
        ge,nhtai pro.j u`ma/j\ to. ga.r e;rgon kuri,ou evrga,zetai w`j kavgw,\
1) 조심하다 :  ble,pete
1.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블레포(Aeschyl. 이래)는 '보다 see'를 의미하며, 호라오(oJravw, 3708: 보다)에서보다 눈의 기능에 더 강조를 둔다. 따라서 블레포는 '눈이 멀다'의 반대어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이 단어는 '알아차리다, 인지하다' 심지어 '통찰(간파)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2. 70인역본의 용법
블레포는 70인역본에서 130회 나오며, 히브리어 '라아, 파나, 하자' 등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블레포는 70인역본에서 '보는 것, 인지하거나 보는 능력, 환상' 등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블레포는 신약성경에서 132회 나오며,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다.
(a) 감각-지각작용 중에서 단순히 '보는 능력' the capacity to see 을 뜻한다(마12:22; 눅7:21).
(b) '조사하다, 관찰하다'를 의미한다(마5:28; 계5:3이하).
(c) 블레포는 '주의하다, ∼에 주의를 기울이다'(막13:33; 고전1:26), '어떤 것을 주의하다'(고후10:7), '혹은 조심하다'와 같은 지적인 기능들을 나타낸다.
(d)  블레포는 비유적으로 '알아차리다, 인지하다' 혹은 '관찰하다'를 의미할 수 있다(롬7:23; 히2:9).
신약성경은 '하나님을 보다'라는 말을 할 때, 블레포(blepo)라는 말을 쓰지 않고 있다.
(1) 조심하는 일?
조심하는 일은 '보다 see'를 의미하며, 호라오(oraw 보다)에서보다 눈의 기능에 더 강조를 둔다.
따라서 블레포는 '눈이 멀다'의 반대어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이 단어는 '알아차리다, 인지하다' 심지어 '통찰(간파)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마6:4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막4:24 또 가라사대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요 또 더 받으리니
막8:15 예수께서 경계하여 가라사대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막1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막13:23 너희는 [삼가라] 내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막13:33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니라
눅9: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눅21:8 가라사대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로라 하며 때가 가까왔다 하겠으나 저희를 좇지 말라
요9:7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행13:40 그런즉 너희는 선지자들로 말씀하신 것이 너희에게 미칠까 [삼가라]
행27:12 그 항구가 과동하기에 불편하므로 거기서 떠나 아무쪼록 뵈닉스에 가서 과동하자 하는 자가 더 많으니 뵈닉스는 그레데 항구라 한편은 동북을, 한편은 동남을 [향하였더라]
고전3:10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찌니라]
고전8:9 그런즉 너희 자유 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고전10:12 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갈5:15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엡5:15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빌3:2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라]
골2: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골4:17 아킵보에게 이르기를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삼가 이루라]고 하라
히3:12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히3:19 이로 [보건대]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히12:25 너희는 [삼가] 말하신 자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자를 거역한 저희가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 좇아 경고하신 자를 배반하는 우리일까 보냐
요이1:8 너희는 너희를 [삼가] 우리의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얻으라
계1:12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계6:3 둘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둘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보라]) 하더니

2) 디모데가 가는데 조심할 일이 무엇인가?
조심하라는 말이 “관심 있게 지켜보라”는 말이 사용되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을 잘 지켜보라는 말을 번역이 조심하다고 했으니 이해가 좀 어렵게 되었다.
믿음의 사람을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믿음의 사람은 항상 사람들의 모델임을 알아야 한다.
믿음의 사람은 교회 안박으로 지며 졸 것이 있어야 한다.
남들은 어떻게 보고 또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를 알고 살아야 한다.

(계6:3) Kai. o[te h;noixen th.n sfragi/da th.n deute,ran(
h;kousa tou/ deute,rou zw,|ou le,gontoj( :Ercou) Kai. blevpe.
계6:5 세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세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보라]) 하기로 내가 보니 검은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가 손에 저울을 가졌더라
계6:7 네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네째 생물의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오라]([보라]) 하기로
계11:9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목도하며 =  bleyousin]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3) 힘쓰는 자임이라 : evrga,zetai ← e[rgon(에르곤) 일, 행위 work.
(고전16:10)  VEa.n de. e;lqh| Timo,qeoj( ble,pete( i[na avfo,bwj             ge,nhtai pro.j u`ma/j\ to. ga.r e;rgon kuri,ou evrga,zetai w`j kavgw,\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에르곤(Homer 이래)은 폐어 에르고(e[rgw: 일하다)에서 유래했으며, '일, 행위' work를 의미한다. 호머로부터 자주 나오는 이 단어들은 행동이나 적극적인 열심을 나타낸다.
어떤 날을 받아서 수고한 것이 아니고 그냥 일을 하는 사람을 말한다.
일과 힘쓰다는 단어가 같은 단어임을 보아야 한다.
주의 일은 힘쓸 것 없이 그냥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하는 것이다.
주의 일이기 때문이다.